골드만삭스 '다카하시 레포트' 3부작
1936년 2월26일 이른 아침. 120명의 군인이 도쿄 시내에 집결했다. 그들이 애초 향한 곳은 야스쿠니 신사. 그러나 정작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한 고관대작의 집이었다.
젊은 장교가 문을 부쉈다. 잠이 덜 깬 하인은 엉겁결에 무리를 집주인 방으로안내했다. 군인들은 침대에 자고 있던 주인을 쐈다. 주인은 깨지도 않고 즉사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을 대공황에서 구해낸 그는 82세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다시 80여년이 지난 뒤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의해서다.
◇ 아베노믹스의 원형은 1930년대 다카하시 재정정책 다카하시는 1921년 일본의 11대 총리를 지냈다. 옛 50엔짜리 지폐 뒷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회자되는 이유는 재무장관 시절(1932~1936년) 일본 경제를회생시킨 이끈 인물이라서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그를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일본을 대공황에서 구했다(2003년)"고 평가할 정도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3편의 '다카하시' 보고서를 연달아 내놓으며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이 바로 아베노믹스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아베가 선보인 정책들이 80년 전 다카하시의 것과 거의 같다는 뜻이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실제로 아베와 다카하시가 처한 상황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은 당시에도 최소 10년 이상의 장기 디플레이션을 앓았다. 1차대전의 호황이 지나간 뒤 수출이 곤두박질치고 엔화가치가 고평가된 탓이다.
동일본대지진처럼 관동대지진(1923년)도 일본을 휩쓸고 갔다. 거기에 미국발 금융위기(당시엔 대공황)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일본을 더 깊은 침체에 빠졌다.
다카하시는 이런 상황에서 재무장관에 올랐다. 그는 세 가지 경기부양책을 내놨다. 환율, 재정, 통화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931년 12월 취임하는 날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금본위제에선 보유금 가치만큼만 돈을 찍어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없어지자 엔화가치는 무려 40%나 하락했다.
이어 국채를 찍어 재정정책을 확장했다. 1932년 정부지출은 전년보다 13.3%, 1933년엔 10.5% 폭증했다. 이 돈은 주로 군비 증강과 대규모 공사, 만주국 건설 등에쓰였다.
금리 역시 뚝 떨어뜨렸다. 1932년 3월 6.57%였던 일본의 정책금리는 1933년 7월3.65%로 반 토막이 됐다. 1년여간 무려 4차례나 인하한 결과다.
다카하시의 정책은 현재의 아베노믹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는 총리에 오르기 전부터 "윤전기를 돌려 돈을 풀겠다"고 공약했다. 취임 후엔 일본은행이 국채를사들이게 해 재정을 확대하고 2년 안에 통화량을 2배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은 "아베노믹스에 영감을 준 것은 루즈벨트와 그의 경기부양책 모델이 된 '다카하시 고레키요'"(4월19일, FT칼럼)라고 말했다.
◇ 아베는 다카하시와 다르다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엔화가치 절하에 수출이 늘고, 주가는 치솟았다. 일본은행은 국채를 직매입해 시장혼란을 흡수했다.
정책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1933년엔 성장률을 갉아먹던 민간 소비와 투자가 회복세로 돌아섰다. 같은 해부터 고용도 'V'자로 늘었다. 명목 임금 역시 따라 증가했다. 소비자물가는 완만하게 올랐다.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1931년 0.4%에서 1932년 4.4%씩 성장했다. 이어 1933년엔 10.1%, 1934년에 8.7%로 질주했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미국발대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베노믹스 역시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된다. 엔화가치는 집권 이후 20%가량 절하됐다. 닛케이지수는 5년여 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2.9%나 된다. '일본이 되돌아왔다'는 시장 평가 역시 호의적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보면 아베와 다카하시가 처한 상황은 다소 다르다.
다카하시가 취임하기 전 일본정부의 부채는 GNP의 50%를 갓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베가 데뷔하기 직전의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40%에 달한다.
기준금리 역시 아베가 들어설 때부터 이미 0%대라 더 내릴 공간이 없다. 일본이가입한 몇몇 재정건전성 국제협약도 아베의 발목을 붙잡는다.
통화량 확대의 효과 역시 불분명하다. 골드만삭스는 다카하시 당시엔 통화량이늘어나며 3년간 거시경제에 영향을 줬지만, 현재는 인구구조 때문에 통화량이 명목GDP나 물가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투자엔 장기성장 예상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늙고 활력을 잃어가는일본의 인구구조가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소비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상황에선 일본은행이 얼마나 많은 돈을 풀든 간에 경기를부양할 수 없다"며 "아베는 다카하시와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 다카하시 암살 뒤 군국주의 대두…아베노믹스의 향배는 다카하시 재정정책의 성공은 그가 일본은행에 국채를 직매입하도록 한 점이 주효했다.
이렇게 되면 시장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재정은 확대하면서도 금리엔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또 통화량도 늘어나 당시엔 '일석삼조'의 정책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국채 직매입은 사실상 금기시되는 조치다. 재정부담이 너무커지고 초인플레이션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국채 금리가 오르면(가격이 떨어지면) 중앙은행의 이자 부담이나 장부상 손실액도 불어난다.
경제가 회복 궤도에 오르자 다카하시는 방대한 재정지출을 줄이고 싶었다. 그는당시 우경화 분위기로 불어난 군비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이를 우려했다. 젊은 장교들은 결국 1936년2월26일 다카하시와 내각 각료들을 암살했다.
국채발행량을 줄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은 빠르게 군국주의로 빠져들었다. 이듬해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물가는 치솟았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기 직전인 1940년 물가상승률은 무려 30%에 달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다카하시가 시작한 국채 직매입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카하시 정책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아베의 일본 역시 우경화로 빠지고 있다. 아베는 지난달 12일엔 일본 내 항공자위대 기지를 시찰하며 관동군 세균부대인 鬳 부대'를 연상케 하는 전투기에 탑승해 사진을 찍었다.
같은 달 5일엔 프로야구 경기에 나와 등번호 ྜ'을 달고 나와 개헌 발의 요건조항(헌법 96조) 개정을 암시했다. 4월엔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7월 참의원선거가 승리로 끝나면 아베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관측도나왔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아베는 역사의 상처를 악화시키기보다는 장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고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역할을 확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clap@yna.co.kr banghd@yna.co.kr(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1936년 2월26일 이른 아침. 120명의 군인이 도쿄 시내에 집결했다. 그들이 애초 향한 곳은 야스쿠니 신사. 그러나 정작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한 고관대작의 집이었다.
젊은 장교가 문을 부쉈다. 잠이 덜 깬 하인은 엉겁결에 무리를 집주인 방으로안내했다. 군인들은 침대에 자고 있던 주인을 쐈다. 주인은 깨지도 않고 즉사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을 대공황에서 구해낸 그는 82세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다시 80여년이 지난 뒤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의해서다.
◇ 아베노믹스의 원형은 1930년대 다카하시 재정정책 다카하시는 1921년 일본의 11대 총리를 지냈다. 옛 50엔짜리 지폐 뒷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회자되는 이유는 재무장관 시절(1932~1936년) 일본 경제를회생시킨 이끈 인물이라서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그를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일본을 대공황에서 구했다(2003년)"고 평가할 정도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3편의 '다카하시' 보고서를 연달아 내놓으며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이 바로 아베노믹스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아베가 선보인 정책들이 80년 전 다카하시의 것과 거의 같다는 뜻이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실제로 아베와 다카하시가 처한 상황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은 당시에도 최소 10년 이상의 장기 디플레이션을 앓았다. 1차대전의 호황이 지나간 뒤 수출이 곤두박질치고 엔화가치가 고평가된 탓이다.
동일본대지진처럼 관동대지진(1923년)도 일본을 휩쓸고 갔다. 거기에 미국발 금융위기(당시엔 대공황)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일본을 더 깊은 침체에 빠졌다.
다카하시는 이런 상황에서 재무장관에 올랐다. 그는 세 가지 경기부양책을 내놨다. 환율, 재정, 통화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931년 12월 취임하는 날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금본위제에선 보유금 가치만큼만 돈을 찍어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없어지자 엔화가치는 무려 40%나 하락했다.
이어 국채를 찍어 재정정책을 확장했다. 1932년 정부지출은 전년보다 13.3%, 1933년엔 10.5% 폭증했다. 이 돈은 주로 군비 증강과 대규모 공사, 만주국 건설 등에쓰였다.
금리 역시 뚝 떨어뜨렸다. 1932년 3월 6.57%였던 일본의 정책금리는 1933년 7월3.65%로 반 토막이 됐다. 1년여간 무려 4차례나 인하한 결과다.
다카하시의 정책은 현재의 아베노믹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는 총리에 오르기 전부터 "윤전기를 돌려 돈을 풀겠다"고 공약했다. 취임 후엔 일본은행이 국채를사들이게 해 재정을 확대하고 2년 안에 통화량을 2배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은 "아베노믹스에 영감을 준 것은 루즈벨트와 그의 경기부양책 모델이 된 '다카하시 고레키요'"(4월19일, FT칼럼)라고 말했다.
◇ 아베는 다카하시와 다르다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엔화가치 절하에 수출이 늘고, 주가는 치솟았다. 일본은행은 국채를 직매입해 시장혼란을 흡수했다.
정책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1933년엔 성장률을 갉아먹던 민간 소비와 투자가 회복세로 돌아섰다. 같은 해부터 고용도 'V'자로 늘었다. 명목 임금 역시 따라 증가했다. 소비자물가는 완만하게 올랐다.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1931년 0.4%에서 1932년 4.4%씩 성장했다. 이어 1933년엔 10.1%, 1934년에 8.7%로 질주했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미국발대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베노믹스 역시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된다. 엔화가치는 집권 이후 20%가량 절하됐다. 닛케이지수는 5년여 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2.9%나 된다. '일본이 되돌아왔다'는 시장 평가 역시 호의적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보면 아베와 다카하시가 처한 상황은 다소 다르다.
다카하시가 취임하기 전 일본정부의 부채는 GNP의 50%를 갓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베가 데뷔하기 직전의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40%에 달한다.
기준금리 역시 아베가 들어설 때부터 이미 0%대라 더 내릴 공간이 없다. 일본이가입한 몇몇 재정건전성 국제협약도 아베의 발목을 붙잡는다.
통화량 확대의 효과 역시 불분명하다. 골드만삭스는 다카하시 당시엔 통화량이늘어나며 3년간 거시경제에 영향을 줬지만, 현재는 인구구조 때문에 통화량이 명목GDP나 물가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투자엔 장기성장 예상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늙고 활력을 잃어가는일본의 인구구조가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소비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상황에선 일본은행이 얼마나 많은 돈을 풀든 간에 경기를부양할 수 없다"며 "아베는 다카하시와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 다카하시 암살 뒤 군국주의 대두…아베노믹스의 향배는 다카하시 재정정책의 성공은 그가 일본은행에 국채를 직매입하도록 한 점이 주효했다.
이렇게 되면 시장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재정은 확대하면서도 금리엔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또 통화량도 늘어나 당시엔 '일석삼조'의 정책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국채 직매입은 사실상 금기시되는 조치다. 재정부담이 너무커지고 초인플레이션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국채 금리가 오르면(가격이 떨어지면) 중앙은행의 이자 부담이나 장부상 손실액도 불어난다.
경제가 회복 궤도에 오르자 다카하시는 방대한 재정지출을 줄이고 싶었다. 그는당시 우경화 분위기로 불어난 군비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이를 우려했다. 젊은 장교들은 결국 1936년2월26일 다카하시와 내각 각료들을 암살했다.
국채발행량을 줄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은 빠르게 군국주의로 빠져들었다. 이듬해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물가는 치솟았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기 직전인 1940년 물가상승률은 무려 30%에 달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다카하시가 시작한 국채 직매입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카하시 정책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아베의 일본 역시 우경화로 빠지고 있다. 아베는 지난달 12일엔 일본 내 항공자위대 기지를 시찰하며 관동군 세균부대인 鬳 부대'를 연상케 하는 전투기에 탑승해 사진을 찍었다.
같은 달 5일엔 프로야구 경기에 나와 등번호 ྜ'을 달고 나와 개헌 발의 요건조항(헌법 96조) 개정을 암시했다. 4월엔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7월 참의원선거가 승리로 끝나면 아베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관측도나왔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아베는 역사의 상처를 악화시키기보다는 장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고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역할을 확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clap@yna.co.kr banghd@yna.co.kr(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