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소비자에게 최종 인도되기 이전에 이뤄지는 배송 전 검사, 즉 PDI 단계에서 재도색이나 수리 등이 이뤄졌다면 이 차는 중고품일까, 신품일까.
애매한 기준을 두고 정부가 지난해 PDI 과정에서 생기는 하자를 수리할 경우 반드시 소비자에게 '고지'해야 한다는 법 조항을 마련했다. 공장 출고 상태에서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한국에서 임의 수리가 이뤄진다면 사실상 '중고품'에 준한다는 것. 하지만 제도 시행일인 지난 8일 이후에도 고장, 흠집 등 하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정해지지 않고, 관련 세부 규정이 허술해 현장의 볼멘소리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PDI는 '프리 딜리버리 인스펙션(Pre-Delivery Inspection)'의 약자로, 자동차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전 보관 및 정밀 점검이 이뤄지는 곳이다. 특히 수입차의 경우 해외에서 생산돼 1~2개월 동안 한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염분이 강한 바닷바람 등의 영향으로 녹이 스는 등 부식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흔들리는 배 안에서 흠집이 날 수도 있어 통상 PDI 센터에서 기능 결함 점검과 함께 흠집 제거, 세차와 건조 작업이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PDI 과정을 두고 그간 소비자 불만이 적지 않았다. 기능 고장이나 흠집 등으로 인도 전 수리를 하면 중고품이 아니냐는 지적 때문이다. 또한 창고 보관 중 일어난 파손도 PDI 센터에서 처리한다는 점에서 중고품을 신차로 판매한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논란의 요지는 '새 차의 기준'이다. 새 차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자동차 회사는 통상 '소비자 인도 시점'을 새 차의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PDI는 인도 이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PDI는 제작과정의 일부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반면 소비자들은 '공장 출고 시점'을 신차 기준으로 여기는 게 일반적이다. 이미 생산 후 점검이 끝난 상태로 출고가 이뤄지기 때문에 운반이나 보관 중에 생기는 문제는 이와 별개라는 주장이다. 만약 PDI에서 수리가 이뤄져 소비자에게 전달됐다면 신차 가치 하락은 피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게다가 소비자는 완벽한 신차 가격을 지불한다는 점에서 PDI 수리 책임은 회사가 져야한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제조사와 소비자 사이에서 정부는 일단 소비자 손을 들어줬다. 자동차관리법 개정으로 신차 기준을 규정한 것. 실제 자동차관리법 제8조의 22항에 따르면 "자동차 제작 판매사는 자동차를 판매할 때 공장 출고일(제작일) 이후 인도 이전에 발생한 고장 또는 흠집 등 하자에 대한 수리 여부와 상태 등에 대하여 구매자에게 고지해야 한다." PDI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 지를 소비자에게 소상히 밝히라는 이야기다. PDI에서 수리가 이뤄진 자동차는 '중고품'임을 인정한 셈이다.
해당 법 규정은 지난해 마련, 국회에서 처리돼 지난 7일 공포됐다. 이어 8일부터 소비자는 국산차, 수입차를 가리지 않고 공장 출고 후 소비자 인도 전 어떤 수리 과정을 거쳤는지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제도에 대해 일단 업계는 정부 방침을 따른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법 조항에 흠집이나 고장에 대한 범위가 설정돼 있지 않은 만큼 세부 규정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조그만 나사 하나를 교환해도 알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간단 정비는 제외하고 재도색 등 중정비만 고지할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서다.
법안을 어겼을 때 제재 방안도 비교적 약하다. 현재 해당 규정을 위반하면 과태료 100만원 이하(자동차관리법 84조 2항 1의2)를 받는다. 그러나 소비자가 고지 의무를 져버린 자동차 회사에 책임을 직접 물을 수 없어 강제력이 매우 약한 게 단점이다.
이에 따라 수입차 업계는 최근 국토부와 간담회를 통해 기준에 대한 최소 가이드라인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은 수리비가 소비자 판매가의 5% 이상일 경우에만 고지하되 제작사 순정 부품을 사용해 수리할 경우 고지를 제외하는 방안이다.
이와 관련, 수입차 관계자는 "PDI 수리 내역 공개 법령을 두고 자동차, 특히 운송 기간이 긴 수입차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법규라는 지적이 많이 제기된다"며 "더욱이 고지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반쪽 법안에 머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수입차 업계 요구를 담은 가이드라인을 국토부에 제시했고, 국토부가 검토를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국산차 관계자도 "공장 출고 이후 소비자에게 최종 전달되기 전이라도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 할 수 있다"며 "따라서 PDI는 최상의 상태로 제품을 전달하고 싶은 제조사의 책임감이 반영된 과정"이라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세세한 수리까지 모두 고지해야 한다면 제조사나 소비자 모두 피로감이 높아질 것"이라며 "게다가 작은 부분으로 소비자가 인도 철회를 요구할 경우 재고 부담이 높아질 가능성도 높다"고 설명했다.
박진우 기자 kuhiro@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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