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늘 디지털전략부 기자)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던 2015년 6월 23일 오전 11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전자 서초사옥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23일은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90도로 허리굽혀 인사한 뒤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서 확산 진원지가 됐다는 비판에 대한 사과였다.
이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의 미흡한 초기대응에 대해 사과하고 그룹 차원의 지원·개선책을 설명했다.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자리에 섰지만,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자로서 사실상 '삼성 총수'의 대국민 사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이재용 사과문'은 자연스럽게 여론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사과의 정석'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대국민 사과가 끝나자마자 삼성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오르기도 했다.
▲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만능열쇠'는 없다
이처럼 기업 총수가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과거 기업은 위기발생시 침묵하거나 취재 방해, 기업 로고를 가리는 등 노출을 꺼렸다. 그러나 인터넷 발달로 정보가 순식간에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잘못을 숨기기 어려워지면서 대응 방식이 변했다. 자연스레 기업 위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위기 대응 계획이나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계획이나 매뉴얼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위기 유형은 워낙 다양하기에 위기상황의 원인, 책임의 유무, 중요도 등을 고려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
사실 기업이 모든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사과할 필요도 없다. 2011년 식약청은 매일유업 분유에서 유해성분인 포르말린이 검출됐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매일유업은 공신력 있는 11개 기관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유해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제3자 자료를 바탕으로 대응했다. 위기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결백함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유업 사례처럼 제3자의 증언이나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게 아니라면, 기업은 사과문 발표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기업 내부 논쟁으로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사과 타이밍을 놓친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홍보팀에선 '사과문'이라고 작성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법무팀은 법적으로 책임 없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며 충돌한다면 어떨까. 부인, 합리화, 변명 일색의 '이름만 사과문'이 나올 것이다.
언론은 자연스레 '늑장대응', '은폐 의혹'등의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똑같은 사과여도 이런 보도 이후엔 "자발성이 부족하다", "타이밍이 늦었다"는 비판이 딸려오게 된다.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기업이 사과문을 작성하기로 했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한경플러스는 기업 명성관리 전문기업 에스코토스(강함수 대표)의 자문을 받아 기업 명성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과문 작성 원칙'을 준비했다.
'사과문 작성 원칙'은 본문 맨 아래 링크에서 받을 수 있는 첨부파일에 정리되어 있다. 사과문 작성 전 고려사항, 사과문 작성시 사용해야 하는 언어, 사과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등을 짚었다. 아래에선 이를 바탕으로 '성공한 사과문'과 '실패한 사과문'에 대한 케이스 분석에 들어갈 것이다. 위기 발생시 기업 명성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 내부 이해관계자 배려 돋보인 '이재용 사과문'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로 지목됐다. 우선 메르스 의심환자를 보건당국에 제때 보고하지 않았다. 메르스에 감염된 의료진이 있음에도 관계당국에 산업재해 신고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보고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로 부각된 데 대해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삼성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약 1주일 전부터 직접 대국민 사과를 준비했다고 한다.
철저한 준비 때문인지 사과문에 대한 비판 여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네티즌 대부분은 "사과문이 군더더기 없이 명쾌했다"고 평했다.
이른바 '이재용 사과문'이 호평받은 이유는 뭘까. 우선 사과 주체와 잘못을 구체화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부회장은 사과문 첫 문단에서 '삼성서울병원'을 주체로 언급하며 직접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라는 언급을 통해 잘못한 부분도 명확히 밝혔다. 사과 주체와 잘못 두 가지를 앞에 적음으로써 책임 소재를 명확히 짚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갔다.
"아버님께서도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계십니다"라는 부분을 통해 메르스 환자와 가족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주효했다. 문제해결 의지를 밝힌 뒤 음압병실 확충, 백신과 치료제 개발 지원 등 구체적인 개선책 및 개선 방향도 짚었다.
무엇보다 '이재용 사과문'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건 내부 이해관계자를 격려하는 부분이 들어있다는 점 때문이다. "의료진은 벌써 한 달 이상 밤낮없이 치료와 간호에 헌신하고 있다", "이분들에게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린다"는 언급을 통해 직원들을 배려했다.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 최고 관심사인 '피해복구'를 내세워 성공한 GS칼텍스의 사과문
2014년 1월 13일 오전 9시30분께 전남 여수시 앞바다에서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싱가포르 국적 유조선 '우이산호'가 GS칼텍스 소유 부두에 접안하다 송유관에 부딪힌 것이다.
2014년 12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우이산호 도선사였던 김모씨(65)의 운항 부주의가 사고 원인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사고 직후엔 싱가포르 선박회사 측과 접안시설 관리를 맡은 GS칼텍스 중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고가 알려지자 GS칼텍스와 정부가 피해를 보상하라는 여론이 형성됐다. 와중에 GS칼텍스에서 원유 유출량을 축소해 발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결국 GS칼텍스는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사고 발생 약 한달 뒤인 2월 11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GS칼텍스 사과문'은 아직 사고에 대한 책임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표됐다. 때문에 '사과'가 아닌 '피해복구'를 헤드라인으로 사용했다. 아직 불분명한 '책임주체'에 대한 언급은 피했지만, 국민과 피해주민들이 원하는 핵심(피해복구)을 강조하는 전략을 썼다.
사고에 얽힌 이해관계자들을 꼼꼼히 신경썼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사과 대상엔 국민, 피해주민, 해경, 군 장병, 관계 기관 나아가 국가까지 포함됐다. 1차 피해자인 지역 주민들에게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보상 및 피해복구'를 약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GS칼텍스가 사고 축소·은폐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2014년 12월 GS칼텍스㈜ 법인 등은 사고발생 초기 원유 유출량 축소·은폐 혐의에 대해 광주지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과문 자체는 본받을만한 케이스다. 책임소재 규명 이전에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선제적 조치를 취한 점, 이해관계자를 두루 신경쓴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피해 주민과 업체에게 265억원을 선지급하는 등 실질적 피해복구에 적극 나선 점도 그렇다. 현재 GS칼텍스는 피해보상을 완전히 마무리한 상태다.
▲ 엉뚱한 곳에 고개 숙인 '위메프 사과문'
2015년 1월 소셜커머스업체 위메프는 수습사원 부당 해고 논란에 휩싸였다. 2014년 12월 채용한 영업직 수습사원 11명에게 수습기간 2주가 끝나고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해고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박은상 위메프 대표는 같은 달 8일 사과문을 발표하고 해당 인턴들을 모두 합격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8일 내놓은 사과문은 공분을 키웠다. 우선 '통과 기준을 최고수준으로 정했으나 결국 한 분도 최종합격자를 선발시키지 못했다'는 부분이 문제가 됐다. 위메프의 '채용 기준'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이를 해고당했던 인턴들의 자질을 폄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본의 아닌 오해', '저희가 달을 가리켰지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본다면'이라는 부분에서도 자신들은 잘못이 없으나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에 가까운 뉘앙스가 드러난다. 이는 잘못의 원인을 피해자 측으로 전가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사과대상 설정도 잘못됐다. '위메프 사과문'은 대국민 사과문 형태로 쓰였다. 하지만 사과는 국민이 아니라 11명의 수습사원에게 했어야 한다.
▲ 변명에 가까운 메시지로 일관한 크라운제과, 동서식품 사과문
2014년 9월 26일 크라운제과의 유기농웨하스 미생물 검출 관련 사과문은 변명에 가까운 메시지로 여론을 악화시킨 사례다.
크라운제과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유기농 웨하스에서 미생물이 초과검출됐다는 통보를 받고 자체 조사한 결과, 2013년 11월 28일 이후 생산된 일부 제품에서 황색포도상구균이 기준치를 초과해 검출됐다는 점을 발견했다. 결국 당시 시중에 유통된 2만227상자를 모두 회수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무난한 사과문이지만 두 번째 문단이 아쉽다. '미생물수가 기준을 초과한 제품은 (중략) 일부 제품이지만' 문장은 '조건부 사과'라고 할 수 있다. 피해를 축소하려는 느낌을 줘 소비자들의 불신을 키웠다.
2014년 10월 16일 동서식품의 시리얼 대장균 검출 사과문엔 구체적인 잘못(대장균군 검출 제품을 살균해 정상 제품에 섞어 판매했다는 의혹)에 대한 표현이 없다. 단순히 '언론 보도로 인해 심려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한다고 뭉뚱그려 적었다.
논란의 핵심을 언급하지 않아 무엇에 대해, 왜 사과하는지가 불분명하다. 결국 사과문이 아니라 단순 정보전달 형식의 문서가 됐다.
개선책 및 개선의지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도 없다. 회사측은 잘못한게 없으나 언론보도가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 '성공적인 사과문'을 만드는 방법
이른바 '실패한' 사과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위기관리·홍보 전문가인 유재웅 교수(을지대 의료홍보디자인학과)는 △ 사과문을 발표하는 목적 △ 사과 대상 설정 △ 적절한 발표 타이밍을 사과문 작성의 3가지 핵심 요소로 꼽는다. 유 교수는 "목적·대상·타이밍 세 가지 중 하나만 부적절해도 좋은 반응을 얻기 힘들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과문의 성패를 결정하는 건 '진정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함수 에스코토스 대표는 "결국은 사과문을 읽는 사람들에게 수용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라며 "이해관계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 역시 사과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은 사과문이 갖고 있는 '진정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들은 똑같은 사과라도 소비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긴 것인지, 등떠밀려서 하는 사과인지 안다"며 "여론의 무거움을 인식해야 성공적인 사과문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실패한 사과문'이 나오는 걸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 교수는 기업에 있어 '실패 방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우선 위기사안이 어디에 있는지 모니터링해야 한다. 위기로부터 자유로운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내부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 오너 또는 최고경영자가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다. 아래에서 위로 직언이 올라갈 수 없는 경직된 구조라면 적절한 사과문 작성에 필요한 건의나 제안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유 교수는 "대한항공엔 다수의 홍보 전문가가 있었지만 '땅콩 회항' 사건에서 적절한 대응에 실패했다"며 "이는 전문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한 닫힌 조직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강 대표는 "리더부터 평소 위기관리 철학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도부가 위기관리 원칙을 갖고 있어야 빠르고 적절한 위기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 최적의 메시지를 만들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끝)
*'사과문 작성 원칙' 다운로드 링크
https://bit.ly/4iPUVXG
*'사과문 작성 원칙 케이스 분석' 다운로드 링크
https://bit.ly/41Q16VO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히스토리 페이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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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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