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화석유로 불리는 LPG가 국내에서 자동차 연료로 사용된 때는 1960년대 후반이다. 특히 한국에서 LPG가 본격 생산된 이후 개조를 통해 자동차에 사용됐고, 이후 1970년대 LPG 연료가 택시에 사용될 수 있도록 법적 정비가 완료된 후 1982년 자동차회사가 LPG 전용 엔진을 처음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니 한국 내 LPG자동차의 역사도 벌써 50년이 훌쩍 넘은 셈이다. 덕분에 LPG엔진 기술은 한국이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에 본지는 그간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LPG자동차의 한국 내 역사를 정리해 보려 한다<편집자>.
1966년 버스로 시작된 LPG의 수송 연료 사용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의 버스 연료 다원화 덕이 컸다. LPG가 사용되기 이전 전국의 모든 버스는 대부분 디젤을 사용했다. 하지만 매연 등이 문제로 떠오르자 당시 교통부는 도시 공기의 오염을 막기 위해 시내버스는 휘발유, 시외버스는 디젤로 바꾼다는 계획을 나타냈다. 덕분에 휘발유와 연료 성분이 같은 LPG 사용량이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국내 생산의 과잉도 이유로 작용했다. 1967년 상공부에 따르면 당시 울산정유공장의 LPG 생산량은 연간 1,200t이지만 이 가운데 600t만 소비되고, 나머지는 사용처가 없어 고민이었다.
그렇게 도입된 교통부의 버스 LPG 사용 정책은 효과를 발휘했다. 버스를 중심으로 LPG 사용이 급격히 늘었는데, 1968년 서울에만 200대의 버스에 LPG 탱크가 달렸고, 나아가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도 대형 및 소형 버스 700대가 LPG 연료로 전환되면서 본격적인 LPG차 시대가 열렸다.
-버스에서 승용차 택시로
하지만 버스를 중심으로 늘어가던 LPG차에 악재가 닥쳤다. 1969년 하반기 LPG 수요가 늘면서 수급 차질이 우려됐는데, 급기야 석유공사가 사전 예고도 없이 LPG 생산을 돌연 중단하고 터빈 공사에 착수해 전국적으로 LPG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자 상공부는 LPG 공급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공급 순위를 수출기업체, 공업용, 가정용, 음식점 등으로 하되 음식점용은 석유공사가 티켓을 발행하도록 했고, 자동차용 공급은 중단시켰다. 나아가 부족한 LPG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에서 1,000t의 LPG를 수입키로 결정했다. 공급이 얼마나 모자랐는지 그 해 11월 석유공사가 정상적으로 LPG를 내보냈지만 이미 시중에선 판매사업자들이 일방적으로 가격을 높게 받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다. 긴급 수혈을 위해 일본산 LPG 420t이 들어왔지만 물량은 여전히 부족했다.
정부가 자동차용 LPG 공급을 중단하자 전국 500여대의 수송용 LPG 버스를 운행하던 사업자들은 즉시 LPG 엔진을 휘발유로 전환, 개조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가뜩이나 품귀 현상으로 연료 가격이 비싸진 데다 공급이 중단된 만큼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듬해 3월 정부는 LPG 가격을 125% 인상하는 '가스 사용 억제책'을 들고 나왔다. 덕분에 버스로 시작된 LPG의 수송 용도는 승용차로 이어지지도 못한 채 불꽃이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LPG 사용을 주장한 쪽은 교통부였다. 1970년 2월 교통부는 자동차용 연료로 LPG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다는 방침을 나타냈다. 매연발산을 막고 유류 사용에 따른 외화절약 차원에서 LPG의 자동차 사용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운수업자들이 반발했다. LPG 사용에 필요한 탱크, 배관, 카브레타 등의 부품을 새로 갖추는데 필요한 대당 9만원의 비용이 부담이라고 맞섰다. 그럼에도 교통부는 1970년 6월까지 이른바 '가스화(化)'에 필요한 부분품의 양산 체제를 확립해 운행차는 물론 자동차회사가 LPG 연료 장치 설치를 의무화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물론 교통부의 입장은 곧바로 강력한 여론 반발에 부딪쳤다. 한 마디로 1970년 전국에 등록된 10만대의 자동차 중 LPG 연료를 사용하는 차는 400대에 불과한데 자가용에 LPG 사용을 의무화하면 수요를 감당할 공급능력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LPG의 자가용 사용 의무화는 에너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일방통행이라는 비난이 잇따랐다(1970년 2월19일 매일경제 사설).
LPG를 자동차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정부의 조치는 LPG사업자들의 반발도 불러왔다. 1970년 4월 '프로판가스(LPG)협회' 노형우 회장은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동차용 연료로 사용하는 LPG는 엄밀히 따져 공업용 부탄이기 때문에 수급 면에서 공급 과잉상태"라며 "각종 차에 대해 LPG 사용을 금지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LPG업계는 공업용 부탄의 생산은 월 3,500t이 넘지만 자동차용 연료로 사용되는 것은 20%인 750t에 머문다는 점에서 LPG가 부족해 자동차 연료 사용을 막은 것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맞섰다.
하지만 정부의 LPG 사용 억제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다. 125% 오른 LPG 가격은 신규 수요를 억제했고, LPG 버스의 구조변경도 중단시켰다. 사업자로선 비싼 연료비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석유 가격 오르며 LPG 주목
이렇게 관심 밖으로 밀렸던 수송용 LPG가 다시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던 때는 1971년이다. LPG 가격 인상의 직격탄을 맞으며 외면받았지만 1971년 다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평균 20% 가량 올라가자 LPG로 시선을 돌리는 운수사업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LPG가 휘발유보다 저렴한 연료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시에 LPG를 사용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더불어 휘발유 엔진을 LPG로 개조하는 것도 금지했다. 하지만 당장 한 푼이라도 벌이가 아쉬운 택시 사업자에게 'LPG'는 이익이 되는 달콤한 설탕이었고, 이런 심리를 활용해 암암리에 개조를 해주는 이른바 '개조업자'들이 늘어갔다.
개조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당시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73년 9월24일 서울시는 무허가 LPG를 사용한 택시 23대의 운행을 정지시켰는데, 허가받지 않고 구조를 변경한 뒤 LPG를 사용한 태평운수 소속이었다. 당시 기사는 아래와 같다.
"서울시는 허가를 받지 않고 차량 구조를 마음대로 변경하여 LPG 개스를 사용해 온 태평운수소속 서울 아1의 5081 코로나 택시 등 23대를 적발해 3일간 씩 운행 정지 처분하고, LPG 개스 장치를 제거하도록 지시했다(1973년 9월25일 동아일보)."
하지만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단속 이전 서울시는 상공부에 LPG택시 증차를 요구한 적이 있다. 하지만 1973년 8월 당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이낙선 장관은 서울시의 LPG 전용 택시 증차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인했는데, 이유는 역시 에너지 수급 조절이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LPG 연료를 사용하려는 택시 사업자들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불법 LPG 개조가 넘쳐났는데, 당시 상황은 동아일보에 잘 기록돼 있다.
"최근 LPG택시가 부쩍 늘어난 것은 1.14 조치 후 휘발유에 대한 물품세가 종전 200%에서 300%로 대폭 인상됨으로써 휘발유 값이 크게 오르자 택시운전사들은 하루 4,5천원의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 불법으로 가스용기를 부착, LPG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1974년) 서울시내 영업용 택시 1만2,000대 가운데 8,000여대가 LPG차량이며, 이 가운데 서울시로부터 허가받은 LPG택시는 6백20대 뿐이다. (중략) 어느 택시 운전사는 서울시내에서 운행되는 택시 4대 가운데 3대꼴은 LPG 택시라고 지적하고, 휘발유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에 탈세나 위험을 무릎쓰고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1974년 11월26일 동아일보)"
물론 운수업계도 LPG 사용 확대를 건의하고 나섰다. 특히 택시업계는 이웃나라 일본이 61년부터 LPG차를 사용해 1974년 20만대의 LPG택시가 운행되고, 이 가운데 85%가 영업용이라는 점을 들어 1972년부터 LPG 연료 전환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에 부딪쳐 개조는 범법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당시 불법개조에 활용된 차는 무엇이었을까? 1968년 11월15일, 현대자동차는 코티나를 대당 112만원에 판매했다. 당시 코티나를 주목한 곳은 전국택시연합회였는데, 이들은 50만원의 계약금에 20개월 할부, 월 2.2%의 이자를 부담해야 했다. 그리고 코티나에 앞서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또한 택시로 인기가 높았다. 또한 새나라자동차도 적지 않았는데, 여러 자동차가 등장하며 1967년 말 6,278대였던 택시는 68년 말에는 7,256대로 늘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서울에만 8,829대의 택시가 운행됐다. 차종별로는 신진 코로나가 8,218대로 압도적이었으며, 새나라 333대, 코티나 83대였다.
신진 코로나가 1960년 후반 택시로 각광을 받은 이유는 완제품을 그대로 조립했던 새나라자동차와 달리 부품의 21%를 국산화해 제품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가격이 대당 80만원 정도로 비쌌지만 토요타와 기술제휴로 국내에서 1972년까지 4만대가 생산됐을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다. 따라서 택시 또한 코로나가 주도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택시의 시장 주도권이 현대차 코티나로 넘어가고, 토요타의 철수로 코로나 생산이 중단됐지만 LPG 개조의 주대상은 바로 배기량 1,492㏄의 4기통 휘발유 엔진이 탑재된 '코로나'였던 셈이다.
권용주 선임기자 soo4195@autotimes.co.kr
자료협조 : 대한LPG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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