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소비자들이 많이 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기름 1ℓ 넣고 주행 가능한 거리, 즉 표시연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표시연비는 '㎞/ℓ'로 표기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ℓ'로 표시되는 효율을 기준할 때 연간 1만5,000㎞ 주행을 가정하면 필요한 연료량(ℓ)이 산출되고, 여기에 기름 가격을 곱하면 연간 연료소모 비용이 계산된다. 동시에 효율을 측정할 때 배출된 이산화탄소 함량을 표시된 라벨에 부착하는 게 '자동차 표시연비 제도'의 내용이다.
그런데 자동차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액체로 정량 측정이 가능한 'ℓ'가 아니라 시간당 전력량을 뜻하는 '㎾h'일 경우에도 표시연비가 맞을까. 전문가들은 표시연비가 아니라 '전력소비효율'로 불러야 정확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반 가전제품과 마찬가지로 EV 또한 전력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 경우 월 평균 이용거리를 산출해 필요 전력량을 표시하는 에너지소비효율등급 라벨이 부착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흔히 가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냉장고의 경우 월 단위 평균 사용 전력을 표시하고, 그에 따라 연간 전력 사용금액이 고지돼 있다. 냉장고만 해도 매월 38.9㎾h의 전력을 소모할 경우(714ℓ 기준) 에너지소비효율은 1등급에 해당되고, 전기요금은 연간 7만5,000원으로 표시된다. 또한 시간당 23g의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적혀 있다. 반면 같은 전기를 쓰는 EV는 '㎞/㎾h'로 표시된다. 냉장고와 같은 전기에너지를 소비하지만 EV는 어디까지나 이동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동 가능한 거리를 효율로 나타내는 셈이다. 하지만 에너지소비효율은 어떤 에너지를 사용하느냐를 기준 삼아야 하는 만큼 EV의 '㎞/㎾h' 단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는다.
사실 이런 과도기적 논쟁은 EV의 등장이 가져오는 여러 혼란 가운데 하나다. '이동'이라는 본질적 운송 수단의 에너지가 전기로 바뀌는 것은 산업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다. 사실 엄밀히 보면 가정에서 사용하는 진공 청소기에도 바퀴가 달려 있다.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는 사람의 힘, 즉 인력(人力)에 따르지만 이동을 위해 바퀴가 부착돼 있다. 만약 바퀴마저 전력으로 이동시킨다면 자동차와 다를 바 없는 운송수단의 하나가 된다. 이 경우 지금의 기준이라면 '㎞/㎾h'를 사용해야 한다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이성적인 논리도 성립된다.
많은 사람들이 EV의 등장을 두고 친환경 얘기를 언급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EV의 등장이야말로 단순한 친환경 자동차가 아니라 아니라 글로벌 산업사회의 구조 자체를 뒤바꾸는 '혁명'이라고 강조한다. 인류를 지배해 온 화석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대체되는 과정이고, 화석에너지 기반의 다양한 기계 및 화학산업 등이 전기 중심의 사회로 바뀌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런 행보는 빨라지고 있다. 블룸버그 뉴에너지파낸스(BNEF)에 따르면 2025년이면 미국과 유럽에서 EV 가격이 내연기관차보다 낮아질 전망이다. 현재 EV 가격의 절반에 달하는 배터리 가격이 20% 내외로 떨어질 수 있어서다. 그러자 르노는 2020년이 되면 EV 총 소유 비용이 내연기관차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EV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탈 것부터 변하는 산업사회에 일찌감치 적응한 후 '움직임'의 원천인 전기에너지 분야도 진출한다는 비전을 만들어 둔 상태다. 따라서 EV는 단순한 친환경 이동수단이 아닌, 사회 구조와 생활 패턴을 바꾸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최근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미 EV를 '이동하는 배터리' 개념으로 접근, 다양한 활용 방안을 내놓는 중이다. 움직일 수 없는 냉장고에 전력을 공급하는 이동 배터리의 역할이다. 이 경우 효율 표시는 어떻게 해야할까. 전력소비효율, 아니면 표시연비? 지금 사회에 EV가 던진 화두이자 고민이다.
권용주 편집장 soo4195@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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