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무대 같은 연출에 신명나는 창과 연기… 스토리는 '글쎄'

입력 2018-02-28 17:50   수정 2020-03-16 17:02

화려한 무대 커튼 위로 푸르스름한 파스텔톤 조명이 비친다. 무대 앞 연주자들이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를 연주한다. 여성 가수가 붉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해 마이크를 든다. 재즈 선율이 관객의 귀에 와 닿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한국 전통음악 ‘창(唱)’. 조곤조곤 속삭이듯 노래하다가 때때로 목청을 높인다. 바닥에 드러눕거나 폴짝 뛰는 등 연기도 한다.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이 가수 한 명밖에 없는 ‘모노드라마(1인극)’다. 드럼 연주자는 가락에 맞춰 드럼 스틱 대신 전통 북과 북채를 들기도 한다.

2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창극 ‘소녀가’ 장면이다. 소녀가는 국립창극단이 젊은 예술가와 협업해 새로운 유형의 창극을 잇따라 선보이는 ‘신(新)창극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신창극시리즈의 취지에 대해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음악극을 표방하되 소재와 방식, 공간 등은 협업 예술가의 상상력에 맡긴다”며 “젊은 예술가가 동시대적 감수성을 기민하게 흡수한 혁신적 작품을 계속 공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소녀가의 협업 예술가는 다재다능한 젊은 소리꾼 이자람이다. 이자람이 그동안 창작 1인극을 꾸준히 선보여온 노하우를 살려 이번 작품에서도 직접 대본을 쓰고 작창을 하고 음악감독과 연출까지 맡았다. 무대에서 창을 하고 연기를 하는 배우는 이소연 국립창극단 단원이다. 창극단이 모노드라마 형식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녀가는 프랑스 구전동화 ‘빨간 망토(Le petit chaperon rouge)’를 모티브로 했다. 이 동화는 프랑스 동화작가 샤를 페로(1628~1703)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얘기를 1697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며 처음 기록됐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숲으로 들어간 소녀가 늑대의 꾐에 빠져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내용이다. 2010년 프랑스 작가 장 자크 프디다는 ‘빨간 망토 혹은 양철 캔을 쓴 소녀’라는 제목으로 이 동화를 재창작했다. 그는 소녀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했고 위기에서 소녀가 스스로 탈출토록 했다. ‘어른의 말을 안 들으면 파멸한다’는 원작의 취지를 180도 틀었다.

소녀가는 프디다의 재창작 동화와 맥을 같이한다. 소녀는 호기심을 푸는 데 적극적이다. 이 호기심이 성적인 행위와 관련된 것이란 암시가 많이 나온다. 소녀는 무대에 드러눕는가 하면 관능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늑대는 소녀를 범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늑대는 부처님 손바닥 위 손오공이다. 소녀는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본다. 소녀는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를 가지고 놀며 잔뜩 약을 올리고는 줄행랑을 친다.

유머 있는 스토리, 현대적이고 세련된 연출, 신명 나는 창이 작품의 매력이다. 근래 창극단이 했던 어떤 작품보다 유쾌하다. 70분으로 길지 않은 공연 시간, 2만~3만원으로 저렴한 관람료도 부담 없다. 다만 스토리가 개연성이 없고 다소 엉성하다. 성적 행위에 대한 소녀의 호기심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열지만 결말은 ‘소녀의 도망’이다.

호기심을 풀고자 하는 소녀의 행위가 시늉에 그치고 만다. 주제 설정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조신하지 않고 씩씩한 소녀를 보여주겠다”는 작품의 취지도 새롭지 않다. ‘빨간 망토’를 비슷한 주제로 뒤튼 소설이나 영화를 그동안 많이 봐 왔다. 지금 시점에서는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신창극시리즈 두 번째 시리즈 작품은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최근 잇따라 히트작을 내며 주목받고 있는 김태형 연출가가 참여해 오는 10월께 선보인다. 소녀가에서 “가보지 않은 길로 갈 거야, 재미있어 보이는 길로 갈 거야”라는 소녀의 대사처럼 이 시리즈가 창극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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