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준 기자] 모델도 다 같은 모델이 아니지 않나.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 ‘저런 사람도 모델이야?’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작금의 시대에 박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델’ 그 자체였다.
데뷔 12년을 맞이한 월드 클래스 탑 모델에게 ‘잘한다’라는 말은 결례일 것. 카메라 앞에서 자유자재로 바뀌는 그의 포즈와 표정에 마음속으로는 연신 ‘브라보’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해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내지 못했다. 칭찬은 물론 감히 어떤 포즈나 표정을 요구할 수 없는 프로 모델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좀 전 촬영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프로패셔널함으로 에디터를 놀라게 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솔직함 또 약간의 허당미까지. 런웨이나 사진으로만 그를 만나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가 한국 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도 모델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도전하기 위함이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박지혜를 알아줄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안심이다. ‘넥스트’를 찾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탑 모델 박지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근황이 궁금하다
“해외 활동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요즘에는 한국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이 내 나라이기도 하고 지금 시기를 놓치면 한국 활동을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해외 활동은 일이 있을 때마다 왔다 갔다 하고 있다”
Q. 국내 활동에 비중을 두는 이유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돌이켜보니 해외 활동을 꽤 오래 했더라. 6년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내 나라가 그리웠다. 한국 사람들도 그립고 향수병 때문에 힘든 점이 있었다. 또 한국에서 더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해외 활동에 집중하다 보니 한국에서 인사드릴 기회가 적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박지혜라는 사람을 더 알리고 싶어서 들어왔다”
Q. 이번 서울패션위크에서 만날 수 있는 건가
“지금은 여러 쇼에 설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즘은 신인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돌이켜보면 나도 감사하게도 신인 때 많은 쇼에 서서 아쉬운 마음 같은 건 없다. (웃음)”
Q.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
“당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큰 성취를 이뤘을 때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인간 박지혜로서 보람 있던 일을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내가 모은 돈으로 집을 사드렸을 때 되게 뿌듯했다. 그때 내가 이 일을 한 것에 대해 큰 보람을 느낀 것 같다”
Q. 슬럼프는 없었나
“당연히 있었다. 연차가 쌓이다 보니까 처음에는 즐겁게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무뎌지더라. 좋아하는 일이긴 한데 정말 ‘일’이 돼버렸다고 느낀 때가 있었다. 기계처럼 포즈하고 표정 짓고 워킹 하고 그런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너무 힘들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도 많았다”
Q. 즐거웠던 시절 이야기도 해보자
“해외 활동을 시작한 게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회사를 한번 옮겼는데 그와 동시에 해외 활동을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잘 몰랐었는데 해외 활동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았다. 자아가 깊어질 수 있었던 시간이다”
Q. 해외 컬렉션도 정말 많이 섰다. 기억에 남는 쇼가 있다면
“늘 얘기하는데 데뷔 쇼, 데뷔 시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 같은 경우 해외에서 계약도 하기 전에 몇몇 에이전시가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게 한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는데 그때가 마침 패션위크 캐스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큰 기대는 안하고 경험이라 생각하고 캐스팅을 다녔는데 너무나 감사하게 이슈가 되는 큰 쇼에 바로 캐스팅이 됐다. 그렇게 해서 데뷔하게 된 쇼가 바로 알렉산더 왕이다. 그 쇼에서 첫 워킹을 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Q. 해외 무대 데뷔가 모델 박지혜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물론 한국 활동할 때도 일을 바쁘게 하긴 했지만 모델로서 터닝포인트를 찾고 나를 알리게 해준 사건이었다. 이 일을 시작할 때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Q. 같이 해외에서 활동하던 모델들이 국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모델 일이 수명이 그리 긴 직업은 아니다. 다들 다음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한편으론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 나도 한국에 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에서 다른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또 다음 전환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첫 번째 전환점이 해외 진출이었다면 지금 또 다른 ‘넥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도해보지 않았던 다른 분야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Q.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분야가 있을까
“사실 조금 조심스럽다. 어릴 때는 자신감도 넘치고 ‘도전하면 되지!’ 이런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좀 움츠리게 되더라. 기회가 된다면 방송 일도 너무 좋고. 처음에는 연기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배워보기도 했는데 너무 어렵더라. 그리고 해외 활동을 병행하면서 매주 연기 레슨을 받기에는 집중하기 어려워서 포기했다. 내가 해왔던 게 있으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찾고 있는 중이다”
Q. 개인적으로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박지혜의 생각은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모델은 키가 제일 중요하고 딱 봐도 모델 느낌이 강한 사람들을 선호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개성에 초점을 맞춰 수요가 많아진 것 같다. 자신감 있고 끼 있는 어린 친구들이 정말 많다. 내 생각에도 모델이 꼭 키가 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신체 조건이 잘 갖춰졌다면 좋겠지만 열정이 있고 노력이 뒷받침되는 사람이라면 모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또 모델이 모델만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방송, 연기, 음악 등등 여러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Q. 모델 지망생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모델 일이 보이기에는 되게 화려하고 신기한 세계잖나. 나는 그런 세계의 박지혜와 인간 박지혜 사이의 괴리감으로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은 화려한 세계만 동경할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을 함께 가꾸면서 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허세 없이 진지한 태도로 모델 일에 임했으면 좋겠다”
Q. 눈여겨보는 후배가 있나
“우리 회사에 한성민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굉장히 매력적으로 생겼더라. 사진이나 실물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전형적인 모델형은 아닌데 그 친구가 가진 매력이 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잘해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Q. 박지혜도 이름을 알리기 전에는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일이 많았던 케이스는 아니다.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고 회사에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경쟁자가 많아서 데뷔를 했어도 직접 나서지 않으면 일이 없다. 직접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 방법을 누가 알려주거나 내가 선배들을 붙잡고 물어볼 상황도 아니었고. 동기들끼리는 또 경쟁 아닌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웃음)”
“데뷔하면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되게 혹독하더라. 너무 일이 안 풀리기에 25살까지 가망이 안 보이면 깨끗하게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웃음) 그 시기에 잡지도 많이 보고 쇼도 많이 보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내가 부족한 게 뭔지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나를 알아봐 줄 때까지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장윤주 언니가 2년 동안 워킹 연습만 했다고 말했듯이 나도 2년 가까이 공부의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경제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통장에 4천 원이 찍힌 적이 있었다. (웃음) 아르바이트도 참 많이 했었다”
Q. 올해로 데뷔 12년이 됐다. 베테랑 모델의 고민은 어떤 게 있을까
“과거에는 모델은 모델 일만 했으면 됐다. 나도 ‘모델이면 모델 일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선배들이 다양한 분야에 나서면서 모델이 모델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나는 모델로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 앞서 말했듯이 ‘넥스트’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분야에 나가기 위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게 요즘 내 고민이다. 내가 모델 일 외에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Q. 친한 모델이 있다면
“(김)성희 언니도 친하고 제일 친한 건 스테파니 리. 그 친구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알게 된 사이다. 지금 배우로 전향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데 응원해 주고 싶다”
Q. 식상한 질문이지만 몸매 관리 비법도 전해달라
“개인적으로 필라테스를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시간이 될 때 하려고 한다. 비싼 게 흠이 지만. (웃음) 그렇게 운동을 하면 먹어도 살이 안 찌더라. 해외 활동할 때는 몸매가 정말 깡말라야 한다. 근육이 생기면 안 돼서 그때는 운동도 못 하고 먹지도 않았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내 키가 되게 크지 않나. (박지혜는 179cm다) 그런데 이 키에 40kg대를 유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힘들게 살을 빼고 제일 말랐을 때 제일 쇼를 많이 섰다. 그렇게 하다 보니 폭식하게 되고 몸이 너무 상했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하니 너무 말라도 보기가 안 좋더라.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면서 유지하고 있다”
Q.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뭔가
“최근에 한국에 집을 구했다. 물론 자가는 아니고 전세지만. (웃음) 새집으로 이사를 해서 인테리어나 가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또 새 차도 구입했다. 태어나서 처음 차를 사서 운전 연습을 하고 있다. 운전면허를 딴 지도 얼마 안 됐다. 배우고 싶었던 것들 배우고 더 배워보고 싶은 것들도 찾아보고 있다. 지금은 피아노를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다”
Q.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까
“한국 활동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나.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내 커리어가 더 풍성하고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또 모델 박지혜도 좋지만 인간 박지혜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봉사나 기부도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Q. 그럼 인간 박지혜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미래를 늘 고민하며. (웃음)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 생긴 건 되게 다가오기 힘들게 생겼다는 걸 안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은 게 아닌데 무표정이면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 밝은 모습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웃음)”
Q. 국내 활동 각오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는 모르겠다. 방송이 될지 음악이 될지. (웃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패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래도 나를 좋아해 주시고 지켜봐 주신다. 나라는 사람을 계속 좋은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고 기대해주셨으면 좋겠다”
에디터: 오형준
포토: 김연중
의상: KYE, 문탠, bnt collezione(비앤티 꼴레지오네), 자라
슈즈: 문탠, 바이비엘
주얼리: 바이가미
시계: 오바쿠
헤어: 콜라보엑스 마준호 실장
메이크업: 콜라보엑스 란주 실장
장소: 펜션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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