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일자리자금 남아돌자, 또 실적 '닦달'…집행기관들 "못해먹겠다"

입력 2019-03-11 17:41   수정 2020-11-25 15:53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분을 세금으로 보전하는 ‘일자리안정자금’ 사업에 동원된 공공기관 직원들이 업무를 거부하겠다고 나섰다. 정부가 업무에 필요한 인력 지원 없이 공공기관에 위탁계약을 강요, 무리한 실적 채우기에 나서자 보이콧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일자리안정자금 신청 업무를 맡은 건강보험공단과 국민연금공단 노동조합은 11일 공동 성명서에서 “지난 1년간 관련 인력이 전혀 지원되지 않은 채 정부 목표 채우기에 기관이 동원되는 바람에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본연의 업무가 훼손됐다”고 밝혔다. 노조는 이어 “정부는 올해도 문제점 개선 없이 일자리안정자금 접수 위탁계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노조 관계자는 “위탁업무 거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이 16.4% 인상된 지난해 도입된 일자리안정자금은 30인 미만 사업장의 월급 210만원 이하 근로자 1인당 월 13만원씩을 사업주에게 지원하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해 일자리안정자금 예산으로 2조9737억원을 편성했지만 4600억원가량은 쓰지도 못했다. 정부는 그럼에도 올해 또 2조8188억원의 예산을 짰다. 올해 최저임금을 10.9% 추가 인상한 데 따른 부작용을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일자리자금 남아돌자, 또 실적 '닦달'…집행기관들 "못해먹겠다"

일자리 안정자금 접수 업무를 맡은 건강보험공단의 서울 지역 A지사 직원들은 올 들어 관할 사업체에 자금 신청을 독려하는 전화를 하루 수백 통씩 돌리느라 정신이 없다. 다른 지사에 비해 지난해 실적이 저조해 본사에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급격히 오른 최저임금을 못 맞추거나, 4대 보험 가입이 부담스러워 신청하지 않겠다는 업주가 태반”이라며 “그럼에도 실적을 닦달하니 건강보험 관련 업무는 신경도 못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분을 세금으로 보전하는 일자리 안정자금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사업을 떠맡은 공공기관에서조차 집단 반발이 이는 등 잡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해 약 3조원의 예산을 편성하고도 4600억원가량은 아예 집행도 못하자 올해는 유관 공공기관에 위탁계약을 강요하고 나섰다. 건보공단, 국민연금공단 등 해당 기관들은 “인력 지원이 없다면 더 이상 일자리 안정자금 접수 업무를 하지 않겠다”며 보이콧까지 불사하고 있다.

“신청 독려하느라 하루 수백통씩 전화”

보건복지부 산하 건보공단과 연금공단 노동조합은 11일 공동 성명서에서 “일자리 안정자금 업무 압박으로 인해 공단 본연의 업무가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공식적인 할당은 없지만 지사별 실적이 비교되다 보니 부담이 크다”며 “위에서 문서로 남기지 않기 위해 전화로 실적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금공단 관계자는 “정부는 강요가 아니라고 하지만 공공기관 업무가 실적치 없이 이뤄지겠느냐”고 했다.

일각에선 신청요건이 안 되는 사업주에게까지 자금을 지원하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고 있다. 서울 동대문에서 의류도매업을 하는 A씨는 “우리는 이미 월 210만원 이상을 주고 있다고 했지만 ‘각종 수당을 제외하면 요건을 맞출 수 있다’는 식으로 신청을 재촉하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고 말했다. 일자리 안정자금을 받으려면 최저임금을 준수하면서 월급이 210만원 이하여야 한다.

정부의 무리한 실적 채우기는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지난해 편성한 예산 약 3조원 중 15%인 4600억원가량은 쓰지도 못했다. 건보공단 직원 B씨는 “지난해 최종 집행률 85%가 될 때까지 내부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밖에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라고 털어놨다.

건보·연금공단 “이대로라면 업무 거부”

정부는 올해도 3조원에 가까운 일자리 안정자금 예산을 편성했다. 최저임금을 10.9% 추가 인상해놓고 부작용을 막겠다는 것이다. 올해는 건보공단, 연금공단 등에 인력 지원을 명분으로 위탁계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지난 8일 기준 예산 집행률은 12%가량이다. 연금공단 노조 관계자는 “정부가 제시한 인력 지원은 6개월 정도”라며 “나머지는 또 공단 근로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건보공단과 연금공단 노조는 업무 거부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 노조는 “인력 지원 등 개선이 없다면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 공단은 지난해 집행 실적의 20%를 담당했다.

세금만 축내…건보 재정에도 악영향

일자리 안정자금 사업이 효과는커녕 세금만 축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일자리 안정자금 실적에 대해 “고용 안정에 기여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월 실업자는 122만4000명으로, 19년 만에 최대였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직격탄을 맞은 사업시설관리(-7만6000명), 도·소매(-6만7000명), 숙박·음식점(-4만 명) 등은 고용이 더 줄었다.

건강보험 재정에도 악영향이다. 정부는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대상에 대해 건강보험료 50~60% 경감 혜택을 주고 있다. 건보공단 노조는 지난해 건보료 경감으로 인한 수입 감소액이 2648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건강보험 재정 악화는 건보료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은 내년 최저임금 인상은 최소화하고, 그에 맞춰 일자리 안정자금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세금으로 민간업체 인건비를 지원하는 것은 지속할 수 없는 정책”이라며 “자영업자 반발을 달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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