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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기자] 4월11일 공개작 ‘페르소나’ 지수 役
원석. 신인 배우는 원석이다. 그래서 세상에 실존하지만 세상은 그를 모른다. 제련 전 원석이 한낱 광물에 불과하듯, ‘행인1’은 무명 배우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편, 옛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그 행인1에 있다. 과거에는 주인공만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는 말 한마디 하고 사라지는 행인1도 눈에 띄는 것이다. 채 영글지 않은 외모 그리고 어색한 대사 처리. 허나 눈에 총기만은 또렷하다. 그 눈빛이 ‘나 여기 있어요’인 것을 이제 알겠다.
영화 ‘페르소나’ 중 단편 ‘썩지않게 아주 오래(감독 임필성)’에도 원석은 있다. ‘썩지않게 아주 오래’는 비밀이 많기에 더 매력 있는 여자 은(이지은)과, 그에게 참사랑을 언급하는 남자 정우(박해수)의 사랑에 대한 진실과 진심을 다루는 영화. 물론 주인공은 은과 정우이나, 정우 곁에는 그의 무의식과 현실 주위를 맴도는 전 여자친구 지수(배소영)도 있다.
다시 말해 지수는 이 작품의 행인1이다. 그러나 “넌 처음부터 특별했고. 비밀이 많았어”란 극 중 정우의 독백은, 배우 배소영(29)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기도 하다.
하얀 방에서는 어리고 예쁜 애가 그렇게 좋았냐는 험구를, 반면 현실에선 큰 눈망울로 연민을 보내는 지수는 짧은 등장이 무색하게 그 존재감이 확실하다. “지수는 상처 준 남자에게 독설이지만 옳고 좋은 말을 하는 여자예요. 대사부터 매력이 확실했죠. 되게 욕심나는 역할이었어요.” 임필성 감독은 배소영으로부터 ‘나쁜 여자’ 은과 대비되는 ‘좋은 여자’를 발견했다. “캐스팅 소감이요? 영광이었죠. ‘진짜 나 된 거야?’ 싶었어요.”
함께 출연한 박해수에게는 “칭찬”을 건넨다. 주역이 익숙하지 않은 배소영에게 일대일 연기는 가슴 떨리는 한순간이었다. “목이 잘린 정우에게 대사 하는 신이 있어요. 저는 정우 목이 있다 생각하고 허공에 말을 하면 됐죠. 근데 갑자기 선배님께서 오시더라고요. 게다가 누우시는 거예요. 세트장이기 때문에 바닥이 더러울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에도 바닥에 누워서, 또 눈물 연기까지 해주시는 선배님 덕에 몰입이 쉬웠어요. 감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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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언제부터 하고 싶었냐고 묻자, “생각도 안 날 만큼 어릴 때부터”란 대답을 웃음과 함께 터뜨린다.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앞에 그 끼를 억누르며 살았다. 영화나 TV 드라마 속 등장인물을 곧잘 따라한 소녀는 ‘여자는 그러면 안 돼’란 편견에 숨이 막혔다.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했어요. 근데 부모님께 그건 나쁜 거였어요. 딴따라로 치부하셨죠. 하고 싶어도 내색을 못 하고 살았어요.”
고등학생 때는 배우는 대학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만 믿고 가출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반대는 더 거세져 갔다. 6년간의 미(美) 워싱턴 유학은 꿈을 지연시킨 한낱 미봉책이었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근데 부모님께서는 제 꿈을 자꾸 나중으로 미루시더라고요. 결국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국내로 돌아와 선포했어요. 배우 일 하겠다고요. 지금은 제 일을 많이 좋아해주세요. ‘넷플릭스 어떻게 봐?’ 물으실 정도로요.”
물론, 꿈을 좇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른 이들은 동문끼리 뭉칠 때, 비(非) 연극영화과 출신인 그는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이(異)세계를 노크했다.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 사람의 말이 제일 매서웠다. “‘다시 미국에 가서 공부나 해’란 말까지 들었어요. 말로 받은 상처임에도 칼에 찔리는 것만큼 아팠죠. 앞이 캄캄했어요.”
연습실에서 꼬박 1년을 보냈다.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고 조급함마저 닥쳤다. 그런 그에게 현장은 기쁨의 샘터다. “사실 단역은 하는 게 없어요. 뒤에서 표정 연기 하는 게 전부죠. 그렇지만 선배님들 연기에 힘을 얻었어요. ‘내가 연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이거구나’를 현장에서 많이 느꼈습니다. 힘이 많이 됐어요. 덕분에 지금껏 버텼죠. 버텨왔죠.”
가수 윤종신의 ‘멋(서른에게)’은 2019년 서른을 맞은 이 땅의 청춘을 위한 찬가다. 배소영을 비롯한 여러 1989년생 배우들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세는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진 앞이 너무 막막했어요. 현실과 타협하는 문제 등 고민이 너무 많았죠. 지금은 달라졌어요. 서른은 제가 저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꿈이고 이 꿈을 이루는 건 나의 자존감을 세우는 일’이란 생각을 하니까 20대의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이제는 오직 저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게 변했어요. 남 시선을 염려하던 배소영은 이제 없어요. 남이 먼저였다면 지금은 ‘나를 먼저 사랑하자’예요.”
‘짜치게 살지 마 / 나중에 안 그런 척 살지 마 / 다 또 만나 기억해 / 지금의 나를 모두 기억해 / 이 시간들이 이 순간들이 모여 / 가져다줄 추억 그리고 멋 그게 다지’. 미래는 현재가 쌓여 완성된다. “짜치다가 쪼들리다의 경상도 방언이래요. 노래처럼 쪼들려 살지 않으려고 해요. 전 20대를 눌리고 참으며 흘려보냈어요. 때문에 30대에는 타인의 저지나 평가에 억눌리지 않고 그냥 저 배소영답게 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지금만큼은 남들이 바라는 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저로 살고 싶어요. 배우는 사랑받는 직업이잖아요.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이 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잘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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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어떤 이미지가 묻어나냐고 배소영이 묻는다. 극 중 지수와는 다르다고 말하니 까르르 웃는 이 에너지 넘치는 배우는 무채색은 그의 일부일 뿐임을 강조한다. “제가 해보고 싶은 건 저와 정반대 캐릭터예요. 짧은 머리도 해보고 싶고, 욕도 걸쭉하게 해보고 싶고, 마담 같은 센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배우 이지은이 연기한 은이 떠오른다. “너무 매력 있죠. 게다가 은이 정우에게 말하는 걸 보면 틀린 말 하나 없어요.(웃음)”
‘악녀’ 은은 “마음을 꺼내서 나한테 좀 보여 봐”란 말로 눈에 보이는 사랑을 갈구한다. 이에 정우는 말 그대로 그의 ‘참사랑’을 눈앞에 꺼내 보이고, 은은 그 사랑을 썩지 않게 잘 절여서 아주 오래오래 보관하겠다며 웃는다. 한편, 배우는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고 강조한 배소영은, 정우에게 참사랑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참 열정이 있다며 그 표현은 포기를 모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못 알아봐도 좋아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기할 거예요. 역이 크든 작든 언젠가 제 노력과 성장이 대중 분들께 닿는다면 결국 저를 알아봐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제 참 열정의 결실이겠죠.”
어떤 일이 생겨도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배소영에게 전하고픈 말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이다. 그렇기에 행인1에서 보석으로 거듭날 이 신인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오래’ 지속될 박수와 용기다. 옛 영화가 재밌는 이유? 다음은 배소영의 차례다.
(사진출처: bnt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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