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돈을 푼다고 이들 산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당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연구개발(R&D)과 각종 실증·테스트 장비를 구입하고 실험하는 데 예산을 지원한다지만, 그 단계를 지나 시장에 진입하려면 ‘죽음의 계곡’을 넘어야 하는 게 소재·부품·장비업체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어렵사리 국산화에 성공하더라도 좁은 내수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이 험난한 과정을 기업들이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소재·부품·장비를 국가 핵심산업으로 키우겠다면 종합적이고 전(全)주기적인 시각에서 기업 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애로를 호소하고 있는 규제부터 현실에 맞게 과감히 풀어주는 게 시급하다. 기업들이 가장 많이 건의하고 있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 화학물질의 평가와 관리에 관한 규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규제가 그것이다. 자유로운 연구개발과 상용화 활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주 52시간 근로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통해 내놓은 한시적·임시적 규제완화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기업들이 예측가능한 환경에서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규제로 인한 불확실성을 확실히 제거해 줄 필요가 있다.
소재·부품·장비산업은 기술변화가 빠른 정보기술(IT) 산업과 달리 암묵지(暗默知), 장수기술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장기간 지식 축적이 가능한 장수기업을 유도할 수 있는 정책이 요구된다. 일본에는 쇼와덴코(1903년), 스미토모화학(1913년), 스텔라케미파(1916년) 등 창립한 지 100년이 넘는 소재업체가 수두룩하다. 소재·부품·장비가 강한 독일의 히든챔피언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3~4세대 동안 기술 축적이 이뤄져야 글로벌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현실은 반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 부담에 가업 포기를 고민하는 소재·부품·장비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이래서는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상속세 부담을 줄여 기술 축적의 길을 터 줘야 한다. 기업들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예산 배정이란 단일 처방이 아니라 과감한 규제개혁, 상속세 감면 등을 동반하는 패키지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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