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를 준비한 젊은 신학생들이 녹음을 위해 근처에 있는 다른 건물로 이동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장소를 알려준 뒤 A그룹 신학생들에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라”고 지시했다. B그룹엔 “녹음 준비를 하기까지 몇 분의 여유가 있다”고 전했다. 지정된 건물로 향하는 길, 두 그룹의 신학생 모두 한쪽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남자와 마주쳤다. ‘늦었다’는 얘기를 들은 학생 그룹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의 비중은 10%였다. 반면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학생 그룹에선 이 수치가 63%로 올라갔다.
미국 심리학자 존 달리와 대니얼 뱃슨이 ‘착한 사마리아인’ 우화에서 힌트를 얻어 실행한 실험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우화는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상류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그냥 지나쳤지만 유대인과 적대 관계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다. 실험 결과로 우화를 해석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너무 바빴고 사마리아인은 상대적으로 덜 바쁜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인간의 생각과 태도, 행동이 사회 환경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를 파고든다. 동서양의 차이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 <생각의 지도>로 유명한 리처드 니스벳 미시간대 심리학과 석좌교수와 ‘기본적 귀인 오류’라는 사회심리학의 개념을 만든 리 로스 스탠퍼드대 심리학 교수가 함께 쓴 책이다.
미국에서는 1991년 출간됐다. 2011년 출간 20년을 맞아 개정판까지 나온 책이 한국엔 이제야 소개됐다. 번역을 한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가 언급한 대로 “훌륭한 책이긴 하지만 읽기 쉬운 책은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책은 60여 년간 진행된 사회심리학의 주요 연구들의 의미를 살펴보며 어떤 행동은 개인의 성향이나 본성보다 당시 처한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 사람이 차갑고 내성적이거나 혹은 친절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정보가 아니라 시간이 있는지, 상대의 차림새가 어떤지, 술이나 마약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지 등의 상황 판단이 행동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격의 특성과 성향의 중요성에 더 집착하고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들은 그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개인 안에서만 원인을 찾으려는 오류를 되풀이한다고 지적한다. 책은 사회심리학이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와 더불어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풀어낸다. 행동의 직접적인 맥락에 담긴 세부사항은 무엇인지, 행위자는 상황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행위자가 활동하는 더 넓은 사회 맥락 또는 사회 체계는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과정이다. 사회심리학이 실제 의료와 복지, 교육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돼 상황적 변화를 이끌어냈는지도 알려준다.
저자들은 직접 참여한 사회심리학 연구 내용뿐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권위에 복종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 인지된 집단 압력에 굴복해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것까지 거부하는 솔로몬 애시의 선 길이 판단 실험, 홀로 있는 경우보다 집단으로 있을 때 달라지는 빕 라타네와 존 달리의 위급상황 실험까지 살펴본다. 잘 알려져 있는 사회심리학 실험들을 바탕으로 ‘상황의 힘’이라는 핵심 틀을 설명한다.
오래전 출간된 이 책이 사회심리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다른 연구에 미친 영향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사회심리학의 논의는 더 깊어졌고 문화심리학, 응용사회심리학으로 관심은 확장됐다. 행동경제학으로도 맥이 이어져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리처드 탈러의 <넛지>,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등이 등장하는 기반이 됐다.
1996년에 이 책을 처음 접했다는 말콤 글래드웰은 “일상의 경험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준다”며 “‘사람’에게 중점을 두고 ‘상황’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인간의 지각과 관련해 가장 광범위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추천 서문에 소개한다. 학술서 같은 딱딱한 느낌은 있지만 사회심리학의 원형을 파악하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의미와 흐름을 짚어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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