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신뢰의 붕괴
파나마 페이퍼스에는 <포브스>의 세계 500대 부자 명단에 오른 억만장자 29명과 전·현직 세계 지도자 12명, 정치인 140명의 이름이 언급된다. 이름이 언급된 사실만으로 범죄의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부자와 권력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인 방법으로 역외 세금제도를 악용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공정성과 평등의 문제로 이어졌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엘리트 집단과 권력자들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뒤처진 기분을 느꼈다.
이는 은행과 언론, 공립학교, 종교기관, 의회를 비롯한 주요 제도에 대한 신뢰도 조사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1970년 당시 미국인 10명 중 7명은 주요 제도가 대체로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응답했으나, 2016년 동일한 조사에선 주요 14개 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평균 32%에 불과했다. 더 구체적으로 대법원에 대한 신뢰는 45%에서 36%로 떨어졌고, 은행(60%→27%), 대기업(26%→18%), 교회(65%→41%)의 신뢰도 모두 하락했다.
제도적 신뢰 붕괴의 원인
엘리트 집단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는 원인에 대해 세계적인 신뢰 전문가인 레이첼 보츠먼 교수는 그의 책 <신뢰이동>에서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을 거론한다. ‘책임의 불평등’과 ‘격리된 반향실’ 그리고 ‘엘리트와 권위자의 쇠퇴기’이다.
‘책임의 불평등’은 모든 사람이 부정행위로 인해 동등하게 처벌받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난을 야기한 2008년 금융위기 사건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오로지 한 명이었다. 오히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리먼브러더스의 최고경영자(CEO)는 수백만달러를 들고 물러났다. 신뢰를 얻고 이를 유지하려면 규칙을 어긴 사람이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처벌이 행해져야 한다. 공정한 처벌이 없으면 규칙은 무의미해진다.
‘격리된 반향실’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은 의견을 반복해서 듣기 때문에 발생하는 신뢰 상실을 의미한다. 이를 ‘동종선호’라고 한다. 모바일 환경이 갖춰지면서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끼리 모이기가 더 용이해졌다. 사람들은 트위터와 레딧,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채널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의견을 나눈다. 이런 공간에서는 건설적인 합의나 논쟁이 일어나기보다는 동일한 의견만이 더해져 자기 신념이 강화될 뿐이다. ‘가짜 뉴스’는 이런 환경에서 생성되고 확산된다.
엘리트와 권위자의 쇠퇴는 공공기관이나 권위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발생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전문가보다 보통 사람들을 믿기 시작했다. 영국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그의 트위터에 ‘새로운 이중화법 사전: 엘리트=형편없는, 교육받은=어리석은, 회의적인=징징대는, 애석해하는=반동분자, 전문가=바보’라는 글을 올렸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믿음이 여론을 형성하는 오늘날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기간에 영국의 시장조사기관 유고브가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학자도, 경제학자도 믿지 않는다고 응답했으며, 탈퇴 지지자의 3분의 2는 전문가를 지나치게 믿는 것은 잘못이며 보통사람을 믿는 편이 낫다고 응답했다.
신뢰 독점의 붕괴와 분산적 신뢰의 등장
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제도가 출현할 여지가 생겨났다. 기술의 발전은 이를 분산된 신뢰로 채워가고 있다. 기술발전으로 사람과 조직과 컴퓨터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신뢰가 분산되자 기존의 독점적인 신뢰가 붕괴했다. 블록체인이 대표적이다. 블록체인 기술로 인해 더 이상 정부나 은행 같은 중앙집권적 권위가 신뢰를 중재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에어비앤비나 우버와 같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집과 자동차를 이용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아마존의 추천도서나 넷플릭스의 추천 영상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 비즈니스 형태인 크라우드 펀딩, P2P대여, MOOC, 위키피디아 모두 분산적 신뢰로 인해 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뢰가 수평으로 변화하면서 신뢰의 대상이 같은 인간 혹은 알고리즘으로 변하고 있다. 덕분에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위험 요인이 내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이트키퍼와 전문가, 권위자가 뒤로 물러난 시대, 새로운 유형의 경계와 의사결정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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