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전쟁이 봉합되길 기대했는데 더 큰 불확실성의 늪에 빠졌다.”(10대 그룹 A사 부회장)
“일본이 수도꼭지(수출규제 개별 허가 품목 지정)를 쥐고 있는데, 우리가 그 손을 쳐버렸다.”(반도체업체 B사 사장)
“기업들이 이젠 한·일을 넘어 한·미 관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C경제단체 임원)
한국 간판기업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정부가 일본과의 ‘확전(擴戰)’에 불을 붙이면서 소강상태였던 한·일 양국 간 갈등이 다시 ‘강(强) 대 강’ 구도로 치닫고 있어서다. 정부가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기로 전격 결정한 뒤 기업들은 닥쳐올 거센 후폭풍을 걱정하고 있다.
커지는 한·일 확전 공포
기업들이 가장 속을 끓이는 대목은 ‘불확실성’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화적인 광복절 경축사와 일본의 일부 품목(포토레지스트) 수출 허가 등이 이어지며 한때 한·일 갈등이 해결 국면에 접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한 반도체회사 임원은 “불확실성이 너무 커져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극단적 카드’를 꺼내 들면서 기업이 대응할 시간을 벌어주지 못했다는 불만도 쏟아진다. 연구개발(R&D)과 제품화(상용화) 사이의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장벽에 갇혀 소재·부품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시간이 모자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4대 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단시간에 뚝딱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며 “기업이 R&D 및 국산화, 수입처 다변화 등에 제대로 대처할 틈도 없이 최악의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하소연했다.
이 와중에 한·미 동맹마저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기업들을 뒤흔들고 있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방침에 대놓고 ‘우려’와 ‘실망’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안보를 중심으로 한 굳건한 한·미 동맹은 국내외 기업인이 한국에서 마음껏 경영 활동을 할 수 있는 근간”이라며 “이게 흔들리면 당장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을 불안한 나라로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논평 한 줄 못 낸 경제단체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국내 주요 기업은 일본과의 ‘장기전’에 대비해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이들 기업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등 핵심 소재·부품 재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를 구실로 추가 보복에 나설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란 우려가 작지 않다. 수출규제가 장기화하면 국내 반도체산업은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핵심 반도체 소재에 대해 3개월 이상 재고를 확보했지만 일본의 규제가 길어지면 악영향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정부가 오는 28일부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는 동시에 보류했던 개별 허가 품목을 대거 지정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럴 경우 일본 수출규제의 대상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에서 스마트폰 소재, 배터리, 자동차부품, 기계, 화학, 비금속 등 사실상 모든 산업 분야로 확대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산업계 고위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특정 품목을 콕 집어 수출 통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금융과 농산물, 비자 발급 등의 분야에서 추가 보복 조치가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업들은 입을 닫고 있다. 정부의 ‘정치적’ ‘정무적’ 판단에 끼어들었다가 찍힐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경제단체도 마찬가지다.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해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견기업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등은 논평을 한 줄도 내지 못했다.
장창민/고재연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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