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큰 그림 보며 일본과 싸워야

입력 2019-09-04 17:23   수정 2019-09-05 00:12

소설 <삼국지>의 유비는 경쟁자인 조조가 연주의 주인이 되고, 원소와 원술이 각각 기주와 회남을 차지했을 때 조그만 고을 하나를 맡아 남의 부림을 받는 처지였다. 하지만 유비는 “오래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때가 오리라”며 울적해 하지 않는다. “평생을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다”는 조조의 말도 아직까지 많이 회자된다. 중국의 ‘만만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 <대망>에 나오는 일본인들도 만만치 않다. 일본 통일을 이루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인내의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떨까. 요즘은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우리는 빨리 끓었다 빨리 식는 냄비처럼 급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는 이 ‘빨리빨리’ 문화와 관련있다는 게 정설이다. 세계 첨단 정보기술(IT) 제품의 테스트베드가 된 것도 좋은 건 금세 받아들이고 아니면 바로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여러 정황상 일본은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장기간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소재 규제에 이은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 배제 등 정해진 플롯대로 한 단계씩 가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 사전 양해를 구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같이 골프 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큰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추측이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해오자 한반도 전체가 뜨겁게 반응했다.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일본에 정면 승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까지 종결시키는 결단성을 보였다. 자발적인 불매 운동까지 거세게 타오르면서 유니클로 DHC 등 일본 브랜드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이런 반격에 일본의 대응은 어떻게 보면 얄밉도록 느긋하다. 한국 언론이 곧바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한·일 갈등으로 뉴스를 도배할 때도 일본 언론들은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한국이 “공격을 해왔으니 누가 이기는지 어서 붙어보자. 아니라면 대화나 협상이라도 빨리 하자”고 재촉한다면, 일본은 “우린 급하지 않다”고 발뺌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조금 더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일본은 일단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해놨기 때문에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언제든 새로운 품목에 대한 수출보복을 할 수 있다. 반면 시간은 한국 편이 아니다. 당장은 재고가 있어 별 탈이 없지만 화이트리스트 배제 등의 피해는 오래지 않아 가시화될 수 있다.

화끈한 한국인은 도쿠가와보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인다’는 오다 노부나가 성향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전국시대 통일의 가닥을 잡은 오다는 방심한 탓에 혼노지(本能寺)의 변을 맞아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기습을 해왔지만 사전에 몇 수 이상을 생각해놨을 것이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결도 그 수 안에 들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한·일 양국 관계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등 동아시아 역학 관계까지 큰 그림을 보면서 수읽기를 해야 최선의 대응책이 나온다. 일본만 생각하다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ventu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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