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지난 7월 취임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내각 출범 6주 만에 세 번 연속 하원 투표에서 패했다. 지난 3일 하원에 의사일정 주도권을 뺏긴 데 이어 4일(현지시간) 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 통과를 막지 못했다. 하원을 해산시키기 위한 조기 총선도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집권 보수당 의원들까지 등을 돌리면서 존슨 총리의 리더십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하원은 이날 다음달 19일까지 영국 정부와 EU가 합의하지 못하면 브렉시트를 3개월 연기하는 ‘EU 탈퇴 법안’을 가결했다. 이어 존슨 총리가 발의한 조기 총선 동의안은 표결 결과 찬성 298표, 반대 56표로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노동당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의원들은 기권표를 던졌다.
존슨 총리는 전날 하원 표결로 브렉시트 관련 의사일정 결정권을 의회에 넘겨줬다. 야당은 물론 보수당 의원 21명도 존슨 총리에게 반기를 들었다. 존슨 총리는 불과 24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 번 연속 하원에 패배하는 굴욕을 겪은 셈이다.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1면 헤드라인으로 ‘존슨 총리의 패배’를 다뤘다. 가디언은 “존슨 총리가 궁지에 몰렸다”고 전했고, 파이낸셜타임스(FT)도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주도권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존슨 총리의 동생인 조 존슨 대학부 부장관도 존슨 총리와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존슨 부장관은 하원 표결 다음날인 5일 트위터에 “최근 몇 주간 가족과 국익 중 어느 쪽에 충성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며 “다른 이가 내 역할을 맡아야 할 때”라고 썼다. FT는 “이는 존슨 총리의 권위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평했다.
존슨 총리는 그동안 수차례 “영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10월 31일까지 브렉시트를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EU와 협상하지 못하면 노딜 브렉시트를 하더라도 정해진 기한 내에 EU 탈퇴를 강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하원이 ‘EU와 합의하지 못하면 브렉시트 시한을 3개월 연장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존슨 총리의 노딜 브렉시트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다.
다만 하원을 통과한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은 상원에서 논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상원은 법안 거부 권한은 없고 승인 또는 수정만 할 수 있지만, 고의로 법안 검토를 지연시키면서 입법을 막을 수 있다. 상원의 브렉시트 찬성파 보수당 의원들은 ‘시간끌기’를 위해 100개가 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조기 총선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다. 존슨 총리는 보수당 내 ‘반(反)노딜 브렉시트파’를 해산시키기 위해 조기 총선 카드를 꺼냈다. 야당 지지율이 낮은 만큼 조기 총선에서 보수당이 무난히 과반을 차지할 것이란 계산에서다. 노동당과 자유민주당 등 야권도 브렉시트 연기법이 최종 통과되면 총선을 치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4일 표결에선 존슨 총리의 조기 총선 제안을 부결시켰지만, 노딜 브렉시트에 제동을 건 다음에는 보수당과 붙어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존슨 총리는 일단 조기 총선 개최를 위한 표결을 재차 추진할 계획이다. 제이컵 리스 모그 하원 원내대표는 5일 다음주 하원의 의사일정을 소개하면서 오는 9일 조기 총선 동의안을 다시 상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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