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달갑잖은 '태풍 풍년'

입력 2019-09-20 17:39   수정 2019-09-21 00:16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8월, 강력한 태풍 ‘3693호’가 전국을 덮쳐 12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상관측 이후 최대 규모의 인명 피해였다. 그때 포항에서 태풍을 맞은 시인 이육사는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다’고 기록했다.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다’고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태풍의 순우리말 ‘싹쓸바람’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폭풍우 앞에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1923년 8월에 발생한 ‘2453호’ 태풍 때의 인명손실(1157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2002년 8월에는 태풍 ‘루사’의 급습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재산피해(5조1479억원)가 났다.

우리나라 태풍은 대부분 8월에 발생하지만 9월에 생기는 ‘가을 태풍’도 많다. 9월 태풍은 한여름 뒤끝에 바닷물 온도가 높아져 에너지가 커지므로 더욱 사납다. 1959년 한반도를 할퀴며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 37만여 명의 피해를 낸 ‘사라’도 9월에 닥쳤다. 131명의 인명과 4조2225억원의 재산을 쓸어간 ‘매미’(2003년) 역시 가을에 왔다.

올해도 9월 태풍이 두 개나 찾아왔다. 지난 7일 상륙한 ‘링링’은 강한 바람과 함께 왔지만 어제 닥친 ‘타파’는 폭우를 대거 몰고온 ‘비 태풍’이다. 제주 산간에 최대 600㎜ 이상의 비가 쏟아지고 내륙에도 집중호우가 예상된다. 해안 지역의 최대 순간 풍속은 초속 35~45m(시속 125~160㎞), 강풍 반경은 330㎞에 이를 전망이다.

태풍은 바닷물을 뒤집어 해양과 대기를 정화하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주므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태풍에 처음 이름을 붙인 호주 기상예보관들이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이름’으로 작명했을까. 대자연 속이나 인간 사회에서나 태풍은 모두가 꺼리는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가을 태풍으로 가뜩이나 마음 졸일 일이 많은데, 혼란스런 정국까지 초대형 태풍에 휘말리고 있다. 80여 년 전에는 식민지의 ‘빼앗긴 나라’를 뒤흔든 태풍이었지만, 지금은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으로 ‘뒤틀린 나라’를 흔드는 태풍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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