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까지 1m. 평소라면 굴곡도 살피지 않고 밀어넣을 거리다. 수억원의 우승상금이 걸린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근육이 통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1m 퍼트 실수가 대부분 홀 왼쪽으로 새는 이유도 긴장한 나머지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서다. 천하의 프로 선수라도 ‘멘탈’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여러 프로가 이 벽을 넘지 못했다. 골프계가 이를 ‘1m 잔혹사’ ‘마(魔)의 1m’로 부르는 배경이다.
1m 퍼트로 울고 웃은 괴물루키
‘괴물루키’ 조아연(19)은 같은 상황을 하루 두 번이나 맞닥뜨렸다. 처음엔 1m 퍼트가 홀 왼쪽으로 당겨졌다. 하지만 연장전에서 맞은 두 번째는 달랐다. 공이 슬라이스 라인을 타고 홀 중앙으로 빨려들어갔다. 29일 강원 춘천 엘리시안 강촌CC(파71·6329야드)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OK저축은행 박세리인비테이셔널(총상금 8억원) 최종 3라운드의 결말이다.
1타 차 단독 선두로 마지막 18번홀(파4)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조아연의 손쉬운 우승을 예상한 이가 많았다. 조아연은 ‘당돌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타고난 강심장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가 스트로크한 공은 홀 왼쪽으로 흘렀다. 갤러리는 물론 미리 경기를 끝낸 동료 선수들마저 장탄식을 쏟아냈다. 17언더파 196타. 조아연은 동타를 기록한 최혜진(20), 김아림(24)과 3자 연장전에 들어갔고 챔피언 퍼트를 놓친 18번홀에서 열린 연장 3차전에서 기어코 버디를 잡아 우승했다. 조아연은 18번홀 상황에 대해 “파를 하면 우승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많이 떨렸고 그래서 실수한 것 같다. 그래도 우승으로 마무리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아연은 54개 홀로 치른 이번 대회에서 53개 홀을 보기 없이 경기했다. 지난해 6월 열린 에쓰오일챔피언십 우승자 이승현(28) 이후 약 1년3개월 만에 54홀 대회 ‘노보기 우승’을 노렸지만 마지막 홀 보기로 아쉽게 실패했다.
그러나 우승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가져갔다. 지난 4월 열린 롯데렌터카여자오픈에서 거둔 데뷔 후 첫 승 이후 약 5개월 만의 우승이다. 우승상금 1억6000만원을 획득한 그는 시즌 누적상금 6억5660만원으로 상금순위 4위로 올라섰다. KLPGA에 데뷔하자마자 다승을 거둔 역대 여덟 번째 신인선수로도 이름을 올렸다. 이는 이미나(3승), 신지애(3승), 백규정(3승), 김주미(2승), 송보배(2승), 최혜진(2승), 임희정(2승)만이 정복한 고지다.
‘후끈’ 달아오른 신인왕 레이스
‘투톱 체제’로 굳혀진 신인상 레이스에서도 동갑내기 경쟁자인 임희정과의 격차를 505점으로 벌렸다. 조아연은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신인상포인트 270점을 획득해 첫 2000점대(2115점)를 선점했다. 반면 임희정(1610점)은 커트통과에 실패해 추가 신인상포인트를 얻는 데 실패했다.
조아연은 상금 1위를 달리는 현 국내 여자골프 최강자 최혜진과 베테랑 장하나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 수천 명의 구름 관중이 에워싸며 펼쳐진 응원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10번홀(파4)에선 티샷이 왼쪽으로 감겨 페어웨이 벙커에 빠졌고, 두 번째 샷은 그린 뒤로 흘렀지만 침착하게 파를 잡아냈다. 17번홀(파5)에선 과감하게 ‘2 온’을 노렸다. 비거리에서 밀리지 않는 최혜진이 세 번의 샷으로 끊어간 것과는 대조적. 조아연은 2 퍼트로 마무리하며 손쉽게 버디를 챙겼고, 1타 차 단독 선두로 달아날 수 있었다.
조아연과 함께 4타 차 공동 선두로 출발한 최혜진은 전반에 보기 1개를 범해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것이 패인으로 작용했다. 연장 첫 번째 홀에서 약 1m50㎝ 거리의 우승 퍼트를 넣지 못한 탓도 있었다. ‘디펜딩 챔피언’ 김아림은 17번홀에서 칩샷 이글을 하는 등 이날만 8타를 줄이며 맹추격했으나 연장전 첫 홀에서 2m도 안 되는 짧은 파 퍼트를 놓쳐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춘천=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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