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구조적인 저성장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장 동력을 갖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시기입니다.”(정일문 한국투자증권 사장)
“해외 시장에서 한국 투자자와 기업에 안정적인 수익 기회를 제공하는 게 핵심 경쟁력이 됐습니다. 이젠 글로벌 투자은행(IB)들과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자본도 갖췄습니다.”(조웅기 미래에셋대우 부회장)
한국 금융투자회사들은 ‘K머니 수출’의 최전선에 서고 있다. 자기자본을 밑천으로 국내 자금을 끌어다 글로벌 랜드마크 빌딩이나 호텔, 인프라 등 핵심 자산은 물론이고, 글로벌 4차 산업혁명 주도주와 신흥시장 국채를 쓸어 담고 있다. 기관투자가뿐 아니라 개인투자자의 포트폴리오에 해외 알짜 자산을 지속 공급해주는 게 금융투자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십수 년 전부터 기대만 컸던 ‘아시아의 골드만삭스’의 꿈이 이제서야 영글고 있다.
3년 반 새 해외 인력 156%↑
3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대우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삼성증권 등 대형 5개사는 2016년 초대형 IB로 전환하면서 매년 해외 인력을 늘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말 해외법인 인력은 1694명으로 2015년 말(661명) 대비 156% 급증했다. 기업금융 리서치 등 본사 인력도 한국 시장보다는 해외 시장 업무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선봉장은 박현주 회장이 이끄는 미래에셋금융그룹이다. 미래에셋그룹은 10년 넘게 글로벌 시장에서 쌓은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랜드마크 자산을 쓸어 담고 있다. 최근엔 미국 내 최고급 호텔 15곳을 약 7조원에 통째로 가져오면서 글로벌 IB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래에셋대우 IB본부는 지난해에만 해외 시장에서 7조7000억원어치 자산을 쓸어 담았다.
다른 초대형 IB들도 해외 대체투자 시장에서 자기자금 투자를 늘리고 있다. 국내 IB들이 지난해 빌딩과 국채 등 해외자산에 넣은 돈은 2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신흥시장 공략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2017년 말 인도네시아의 단빡증권을 인수한 뒤 지난해 7월 KIS 인도네시아 법인을 정식 출범시켰다. NH투자증권도 신흥시장뿐 아니라 홍콩 법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 법인을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고, 올해 인도네시아 법인에 대한 유상증자도 했다.
글로벌 자산 전쟁의 서막
글로벌 IB들의 순이익은 각각의 자기자본 규모에 비례한다. 자기자본 106조원을 자랑하는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순이익 11조6000억원을 거둬들였다.
한국 초대형 IB 5개사의 자기자본 합계는 27조원 수준으로 커졌다. 지난해 1조8500억원, 올해 상반기 1조4700억원을 벌어들였다. 국내 주식시장 부진에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수익성을 보이고 있다. 브로커리지 중심의 ‘천수답’ 수익 구조에서 탈피해 기업금융·트레이딩 부문 등으로 수익원을 빠르게 대체한 결과다. 자기자본을 토대로 글로벌 우량자산을 인수한 뒤 국내 ‘큰손’들에게 재판매(셀다운)하는 ‘글로벌 도매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IB 부문이 커지는 속도에 비해선 해외 수익 증가가 아직 미미하다. 지난해 골드만삭스와 노무라증권의 해외 수익 비중은 각각 39%, 34%에 이른다. 조웅기 부회장은 “호주 맥쿼리는 전체 수익의 66%(지난해 기준)를 해외에서 번다”며 “자기자본은 맥쿼리(15조원)를 많이 따라잡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했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연구실장은 “지금까진 국내 부동산금융이나 채권 평가이익에서 단기 성과를 거뒀지만 저성장·저금리·저물가 속에 국내 시장에선 답이 없다”며 “앞으로는 과감한 인재 투자 등 중장기 전략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 자본수출
국내 자본을 해외 주식·채권이나 부동산 등 대체자산에 투자해 배당이나 이자 등으로 소득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해외에서 투자소득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자본이 국경을 빠져나가는 자본 유출과 해외에 직접 공장을 짓거나 회사 운영에 참여하는 해외직접투자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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