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무시와 조롱 속 살아남은 한글의 생명력

입력 2019-10-03 17:53   수정 2019-10-04 00:31

“도대체 너희들은 왜 니네 글인 한글을 그토록 무시하는가.” 19세기 말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들은 궁금해했다. “국가의 글이 한글인지 한문인지”도 물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해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한 게 1446년이다. 한글은 오는 9일 573돌을 맞는다.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조선시대 내내 한글은 상스러운 언어 취급을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한글이 국문으로 격상됐지만 일본의 국권 침탈로 이번엔 일본어에 ‘국어’ 자리를 내주고 ‘지방어’로 내려앉았다.

<어찌 상스러운 글을 쓰려 하십니까>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200권이 넘는 우리 교과서들을 살펴본다. 그 속에서 시기별 한글의 변천 과정뿐 아니라 한글을 통해 지키려 한 민족정신의 흔적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책은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 뒤편의 모습을 과거에 편찬된 교과서를 기반으로 들춰본다. 언어학적 분석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풀어내기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시간의 순서대로 읽어가다 보면 조선사회에서 무시했고 조롱했던 한글이 어떻게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됐는지, 나라가 위태롭고 혼돈스러운 시기에 한글이 말살될 위험에도 어떻게 억척스럽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한글의 힘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한 최초의 근대 음악교과서인 ‘창가집’(1910년)과 수학교과서인 ‘정선산학’(1907년) 실업교과서인 ‘간이상업부기학’(1908년) 등 160여 권의 교과서를 통해 일본에 강요된 근대가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가 달성하고자 했던 근대가 있었는지도 추적해간다. 대한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던 밀러 부인이 집필한 초등학생용 지리교과서 ‘초학디지’(1907년) 경상남도편 마지막 부분엔 대마도가 한국의 영토로 기록돼 있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정재흠 지음, 말모이, 296쪽, 1만8000원)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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