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사설 깊이 읽기] '익명'을 악용한 무분별한 악플은 인터넷문화 해치죠

입력 2019-10-07 09:00  

[사설] 1억 배상판결난 악성 댓글…자율정화 없이는 '인터넷 자유'도 없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거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반복해 쓴 네티즌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사이버 테러’ 격인 ‘악플’을 법원도 무시 못 할 범죄로 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특정인을 겨냥한 인터넷의 악성 댓글은 대면의 언어폭력 못지않은 공격이다. 익명 공간이 넘치는 현대사회의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 봐야겠지만, 한국에서는 유난히 심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이번 재판의 여덟 명 피고인처럼 집단으로 무리지어 한 개인을 공격하는 일도 흔하다. 집단 린치는 온라인상이라고 해서 경시될 수는 없다. ‘왕따 문화’와도 닮은 이런 집단 공격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미성숙 사회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업무와 휴식 등 일상생활 모든 면에서 온라인, 사이버 공간의 비중이 커져가는 게 현대사회다. 그만큼 인터넷에서의 절제와 에티켓, 상호존중 문화는 중요하다. 명예훼손이라는 형법상 범죄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상식의 문제다. 하지만 정치권이 더 앞장서는 선동 풍조, 양보·타협·경청의 가치를 삼켜버린 진영논리의 범람, 남녀별·연령별 집단이익 추구 현상 등으로 인터넷의 언어는 거칠기만 하다. 논리 또한 극단을 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플’ 캠페인을 조롱하는 악플, 무제한 자유의 댓글 문화는 그런 데서 저급 경쟁을 부채질해왔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남녀노소, 좌우보혁 할 것 없이 모든 네티즌이 자율정화로 기본 예의에 충실해야 인터넷의 익명성이 주는 자유와 편리를 계속 누릴 수 있게 된다. 인신공격에 허위주장과 가짜뉴스까지 계속 범람하면 ‘댓글 실명제’ 같은 규제가 나올 수밖에 없고, 표현의 자유는 침해받기 마련이다. 댓글과 추천 수 조작 같은 범죄행위의 근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억지 선동으로 양극단의 진영논리를 부채질하고, 툭하면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네거티브 캠페인을 만들어내는 정치권과 그 주변 ‘빅 마우스(big mouth)’들의 자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국경제신문 9월 27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인터넷상에서 '표현의 자유' 중요하지만
특정인을 겨냥한 욕설·비방 자제해야
자율적 정화 못하면 결국 규제 불러


‘개인의 자유, 특히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나.’ 이런 해묵은 문제는 자유의 폭이 점점 넓어져온 근대 이후 모든 현대국가 사회에서 늘 고민하는 중요한 명제다. ‘당신이 주먹을 휘두를 권리도 있다. 하지만 그 권리는 상대방의 코끝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쉽고도 명쾌한 일반적 자유권의 비유도 있지만, 표현의 문제는 다소 다른 차원이기도 하다.

인터넷처럼 익명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고 허용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앞서 시장에서 참가자들의 자유를 생각해보자. 시장이 고유 기능을 발휘하며 특유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참가자들의 제한 없는 자유가 기본 전제지만, 세상의 어떤 정부도 시장 주체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이는 국가 혹은 정부가 본질적으로 갖는 심판 기능, 규제 본능, 나아가 일종의 강압·폭압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어떤 경우든 무제한의 자유는 하나의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시장에서의 자유는 중요하고, 가급적 더 많은 자유를 시장 참가자들에게 부여하는 게 시장의 기능을 살리는 기본 요인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도 원칙적으로 제한받지 않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게시글이든 댓글이든 자신의 정서나 감정, 논리나 철학 이상의 내용이라면 어떨까. 특정인을 향한 공개 욕설과 비방, 터무니없는 모함과 중상의 노출 혹은 ‘가짜 뉴스’라면? 정치인, 대중 연예인 등 이른바 ‘공인’이라면 그래도 약간의 불이익은 감내해야 할 것이다. 물론 범위와 대상이 모호한, 공인의 정의와 인정 범위는 그것대로 문제로 남는다. SK그룹 회장과 그 동거인에 대한 이번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최태원 회장은 공인, 그 동거인은 비(非)공인’이라는 관점을 유지했다. 이런 구별이 합리적인 것인지에 관한 법리적 논쟁은 앞으로 더 필요할 것이다.

비공인을 대상으로 한 반복적 비난,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내용의 공격 등으로 손해배상 판결이 난 것이다. 이런 일로 1억원이라는 배상 규모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통상 법원은 명예훼손 등으로는 이처럼 고액을 배상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만큼 의도적인 명예훼손을 악의적 범죄행위로 보면서 표현의 자유에 책임도 분명히 지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명예훼손 등에 대한 책임 소재 규명, 잘못된 내용의 공격 등에 대한 배상 책임은 선진국으로 갈수록 분명하고 강력하다. 가령 미국에서는 언론 보도라고 해서 예외성이 별반 인정되지 않는다. 부주의한 보도 잘못으로 문을 닫은 신문사도 있다. 하물며 개인 감정풀이 차원의 인터넷 글이라면 사정을 용인해줄 여지가 없다.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기책임은 한국 사회에서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립과 반목, 자극과 공격, 심지어 거짓말과 선동까지 넘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표현은 갈수록 거칠어지며 감정배설이 넘치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율과 자제, 예의와 상호존중이 없다면 강제와 규제 외에 어떤 대안이 있을까. 자율이 아니라 타율, 처벌과 배상이 넘치는 규제와 처벌 만능 사회는 건강하기도 힘들고 지속발전도 난망해진다는 게 치명적 함정이다.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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