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10일 14:14 자본 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10월10일(14:14)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정부가 7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사실상 포기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12월이면 ‘총선 모드’에 돌입하는 20대 국회 임기 만료 전 법안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 기금위에서 정부 입김을 최소화하고 전문가들로 기금위를 구성한다던 정부의 계획도 일단 무기한 보류됐다.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의 원칙)를 도입하며 한진칼에 조양호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국내 기업의 거버넌스에 대한 개입을 늘려가고 있는 국민연금이 정작 정작 스스로의 거버넌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기금위원들에 "법 개정 어렵다"
1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상위부처인 보건복지부(복지부)는 지난 9월 말 기금위 위원을 대상으로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보건복지부는 위원들에게 올해 국민연금법 개정이 어려움을 설명하고,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금위 개선안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기금위 회의에서 기금위 운영 개선 방안 초안을 발표했지만 1년 간 특별한 진전을 보이지 않다 지난 9월 초 비공개간담회를 통해 수정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마저도 포기한 셈이다.
국민연금법은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위와 이를 보좌하는 실무평가위원회(실평위)의 구성과 기능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기금위는 위원장인 복지부 장관, 당연직 위원인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 차관 5인, 연금 가입자를 대표하는 위촉위원 14인을 합쳐 총 20인으로 구성돼 있다. 위촉위원은 사용자단체 추천 3인, 노조 추천 3인, 지역가입자 단체(자영업, 농어업, 시민단체) 추천 6인, 전문기관 2인으로 구성된다. 상설조직은 아니며 현안이 있을 때마다 통상 1~2개월에 한 번씩 개최된다.
지난 9월 초 첫 비공식 간담회에서 복지부는 작년 10월 초안과 마찬가지로 기금위를 상설조직으로 개편하되 정부 당연직 위원을 6명에서 3명, 지역가입자 대표를 6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했다. 반면 사용자와 근로자 측 위원은 현재 3명에서 4명으로 1명씩 늘리기로 했다.
오랜 기간 도마에 올라온 기금위 위원들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도 내놨다. 기금운용 관련 경력이나 학력 등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 전문가를 사용자, 근로자, 지역가입자 단체별로 1명씩 총 3명을 추천받아 상설화되는 기금위의 ‘상근위원’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연금법 연내 개정을 포기하면서 기금위의 구성 자체를 건드리는 위 안은 일단 불가능하게 됐다.
대신 정부는 현재 국민연금법이나 시행령에 규정돼있지 않은 별도의 민간 상근 조직을 신설한다는 안을 내놨다. 사용자 근로자 지역가입자 단체별로 각각 추천한 1인씩 총 3인의 전문가를 상근 인력으로 채용하고, 현재 기금위 산하에 있는 3개 전문위원회(투자정책·수탁자책임·성과평가보상)를 관장토록 한다는 것이다. 간담회에서 복지부 측은 ”다음 국회 회기에서 국민연금법 개정을 재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한 연기금 전문가는 ”현재 전문위에서 올라오는 안건을 분석 평가해 기금위에 전달하는 역할을 기금위 구성 단체가 추천한 인사로 구성된 실평위가 맡고 있는데 상근 기금위 체제가 아니라면 역할 배분이 애매해질 것“이라며 ”임시 방편일 수 밖에 없는 안“이라고 말했다.
◆"다음 국회서도 추진 동력 없어...기금위 개혁 무산된 셈"
이처럼 정부가 법 개정을 포기하고 임시 방편으로 시행령 개정에 나선 것은 국회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12월이면 ’총선모드‘로 돌입하는 상황에서의 기금위 개혁 추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다.
지난 9월 초 제시한 수정안에 대한 기금위 내부의 동의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최소 반년 이상의 시간이 요구되는 법 개정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엔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으로 국회가 여야로 갈려 정쟁이 이어지는 국면에서 정부 여당 측의 어떤 시도도 반대에 부닥칠 것이란 일반의 전망도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기금위 개혁에 대해 현 정부가 과연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크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연금을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것“을 공약으로 내걸며 기금위 개혁 추진을 약속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 공사화안을 폐기하고, 기금위 및 기금운용본부를 여전히 복지부 산하에 두되 기금위 구성만 바꾸는 ’미시 조정‘으로 선회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지난해 10월 기금위서 발표한 초안이다. 초안은 기금위의 민간 위원 14인 전원을 기금운용에 지식 및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로 채우고 기금위를 상설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안은 1년 여간 특별한 논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다 지난 9월 초 보다 약화된 안을 내놨고, 결국 국회를 이유로 들어 개혁을 포기한 셈이다.
이같은 정부의 행보를 두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격“이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는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를 공식 채택한 뒤 민간 기업 경영에 대한 개입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오랜 기간 개선 과제로 여겨져 온 기금위 개혁엔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최근 여야 갈등으로 사실상 협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총선 결과가 어떻든 기금위 개혁은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며 “총선부터 2022년 대선 전까지 현 정부가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최대 1년 이내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 정부에서 기금위 개혁은 사실상 무산된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환/이상열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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