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오른 가을 야구를 지켜보는 직장인 간에는 희비가 엇갈린다. 야구 ‘골수팬’이 아닌데도 경기가 있을 때마다 만사 제쳐두고 TV 중계를 챙겨보는 김과장들이 있다. 가입 때 지정한 구단의 성적에 따라 금리가 결정되는 금융상품에 가입한 이들이다. 경쟁 그룹사 소속 팀을 응원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야구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는 이대리도 있다. 직장 동료들과 그룹 소속 구단을 응원하다 야구팬이 된 직장인부터 상사 눈치를 보느라 ‘야알못(야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 행세를 하는 경쟁사 소속 구단 팬까지, 가을 야구에 울고 웃는 김과장이대리의 사연을 들어봤다.
‘팬심(心)’과 ‘실속’, 야구팬의 선택은?
대기업에 다니는 나 사원(28)은 요즘 야구 경기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TV 앞으로 향한다. 호프집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 구호를 외치다가 옆 좌석 손님들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나씨가 야구 경기 승패에 집착하는 까닭은 따로 있다. 그는 지난 4월 선택한 구단의 야구 성적에 따라 금리가 올라가는 신한은행의 ‘2019 신한 마이카 프로야구 정기예금’에 가입했다. 기본 금리 연 2.0%에 구단 성적에 따라 최대 1.0%포인트까지 우대금리를 받는 게 특징이다. 평소 응원하던 만년 하위권 구단과 우승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구단 중 그는 후자를 택했다. 나씨는 “원래 응원하는 팀에 대한 의리냐 높은 금리냐의 기로에서 금리를 택했는데 아직까지는 만족하고 있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부산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조 대리(31)는 반대로 ‘의리’를 택한 사례다. 어린 시절부터 20년 넘게 롯데자이언츠 구단을 응원해온 그는 지난 4월 부산은행의 ‘가을야구 정기예금’에 가입했다. 롯데가 포스트시즌에서 우승하거나 ‘100만 관중’을 달성하면 우대 금리를 받는 상품이다. 그는 “높은 금리를 기대했다기보다는 롯데의 선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가입했다”며 “내년에도 가입할 것”이라고 했다.
전체 야구팬 중에서는 팬심과 실속 중 무엇을 택한 사람이 더 많을까. 신한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말까지 프로야구 정기예금 가입자 12만여 명 중 절반 가까이가 두산을 택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그만큼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택하기보다는 우승 가능성이 높은 구단을 골라 추가 금리를 받으려는 고객이 많았다는 뜻”이라고 귀띔했다.
“동료들과 야구경기 보며 울고 웃었죠”
그룹 소속 구단이 응원하는 팀인 직장인에게는 가을야구 시즌이 축제나 다름없다. 올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구단의 소속 그룹에 다니는 김 대리(31)는 지난해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야구 문외한이었지만 불과 1년 새 광팬이 됐다. 회사에서 판매하는 경기 할인 티켓을 사 동료들과 함께 보러간 뒤 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팀이 이긴다고 성과급이나 특별한 혜택을 받는 건 아니다”면서도 “동료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응원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했다.
애사심을 야구에 투영하며 경기에 몰입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 사원(30)은 최근 경쟁사를 모기업으로 둔 구단의 연패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취업준비생 시절 수년간 해당 기업에 지원했지만 서류심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경험까지 있다. 지금 직장에 입사한 뒤에도 그는 경쟁사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최전선’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경쟁사 소속 구단이 패배할 때마다 즐겁다”며 “유치하지만 야구를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귀띔했다.
소액을 걸고 하는 건전한 내기도 야구 관람을 한층 더 재미있게 해주는 요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 과장(35)은 올 야구 시즌이 시작하기 전 입사 동기들과 한 내기에서 응원하는 팀의 가을야구 진출에 돈을 걸었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되며 팀이 연패를 거듭하자 스포츠토토로 상대팀에 꾸준히 돈을 걸었다. 그는 “이 덕분에 내기로 잃은 돈보다 많은 금액을 벌었지만 왜 이렇게 씁쓸한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응원하는 팀을 응원한다고 못하고…”
가을 야구 시즌을 고역으로 느끼는 직장인들도 있다. 야구가 대화 소재로 오르는 일이 잦아져서다. 야구팬들은 처음 만나는 거래처 직원이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감대를 형성하곤 한다. ‘야알못’ 김과장이대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순간이다.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홍 대리(36)는 “임원들의 골프 얘기도 지겹지만 젊은 직원들의 야구 얘기도 못지않다”며 “영업을 위해 골프를 배우는 것처럼 야구를 보는 게 직장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따금 챙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응원하는 팀을 응원한다고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슬픔’을 겪는 직장인들도 있다. 한 통신 대기업에 다니는 이 과장(35)은 경쟁사를 모기업으로 둔 구단의 골수팬이지만 팀장 앞에서는 야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애사심이 투철하기로 유명한 팀장이 “경쟁사를 응원하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줄까 우려해서다.
이 과장은 “얼마 전에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졌으면 좋겠다는 팀장의 말에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며 “별것 아니지만 괜히 밉보일 거리를 만들기 싫었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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