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지금 정책 안 바꾸면, 머지 않은 미래에 큰 비용 치른다

입력 2019-10-23 17:45   수정 2019-10-24 00:09

“내년 확장 예산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그제 시정연설이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을 남겼다. 513조원대 ‘초(超)슈퍼 예산’의 배경과 당위성 설명에 연설의 3분의 2 정도를 할애했지만 ‘기·승·전·재정’을 되풀이 강조하는 데 그쳤다. 문 대통령은 “재정이 대외충격의 파고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동의하지 않는 전문가가 많다. 쉽게 돌파하기 힘든 복합위기가 닥쳤는데도 ‘재정만이 해법’이고, 재정을 풀면 술술 풀릴 것이란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운 좋게도 문 정부는 세수 급증기에 집권해 지난 2년여 동안 이전 정부들보다 훨씬 적극적인 재정 풀기에 나섰지만, 거의 모든 지표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도 진지한 반성없이 더 많은 나랏돈을 요구한 것을 정도(正道)라고 보기 힘들다. 늘어난 재정이 복지라는 이름 아래 비생산적인 온갖 시혜성 수당으로 빠져나가고, 지역에 선거용으로 뿌려질 것이란 우려부터 불식시키는 게 순서일 것이다.

시정연설에서 현 경제상황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 아닌, 정부정책에 대한 부적절한 자화자찬이 많았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용률 최고’를 자랑했지만 세금으로 만든 ‘노인 알바’가 새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숱하게 지적돼 온 터다. 경제의 주축인 30·40대와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이 당면한 구조적 실업 문제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대통령은 최하위 20% 계층의 소득 증가를 언급했지만, 이 역시 재정 살포에 의한 이전소득을 제외한 실제 근로소득은 급감한 사실을 외면했다.

“우리 재정이 매우 건전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대목도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돼도 내년 국가채무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0%를 밑돌아 110%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낮다고 강조했지만, 단순비교는 곤란하다. ‘과속 복지’와 가파른 고령화로 가만 있어도 10여 년 뒤에는 부채비율이 급증하게 된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 선진국들이 지금의 한국처럼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비중 14%)로 막 진입할 당시 국가채무비율은 모두 30% 아래였다. 비대한 공기업들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한국적 특수성까지 고려하면 국가부채는 이미 위험수위라는 견해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국회에 예측가능한 정책, 규제 혁신, 공정 경제를 위해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지만 정부가 할 일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원격의료, 스마트모빌리티, 빅데이터 등 미래 산업에서 노조나 기득권 눈치보기로 일관하면서 규제혁신을 말할 수는 없다. 소재·부품·장비산업을 키우자면서 화평법·화관법 개정을 외면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문 대통령은 재정 확대를 주문하면서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재정 확대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시급한 건 시장 스스로의 작동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일이다.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머지않은 미래에 진짜 큰 비용’을 치르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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