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어쩌다 문제작이 됐을까.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영화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성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제작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부딪혔다. 그러더니 이제는 관람 여부를 두고 이성 간 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연까지 속속 등장한다. 한국 사회를 덮친 젠더 갈등이 문화 영역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경보음이 울렸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2019년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현실과 맞닿은 주인공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풀어내며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평범한 이 가족 드라마가 문제가 된 것은 사회에 만연한 여러 차별과 억압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차이가 나타나면서부터다.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맞춰진 초점은 페미니즘의 영역으로 확장됐고, 결국에는 극심한 성 대결 구도로 이어져버렸다.
'82년생 김지영'의 원작 소설은 강남역 살인사건 등으로 이성 혐오에 대한 논쟁이 심하던 시기인 2016년 출간됐다. 남녀로 나뉘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김지영'의 삶을 조명한 이 작품은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일각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자연스레 영화 역시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자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제작을 금지해달라는 국민청원이 등장했다. 개봉일에는 남녀를 구분짓는 이분법적 사고가 담긴 각종 댓글이 쏟아지며 이른바 '평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난데없는 젠더 전쟁이 벌어졌다.
가수 장범준은 '82년생 김지영' 관람을 기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아내 송승아의 SNS 게시물에 물음표 네 개를 댓글로 남겼다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지영에 공감하는 송승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쏟아지면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던 것. 이 또한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 젠더 갈등이 해소가 아닌 심화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단적인 사례였다.
외신도 현 상황에 주목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82년생 김지영: 페미니스트 영화가 한국의 긴장을 재점화했다'라는 제목으로 영화의 개봉과 맞물려 발생한 갈등과 논란을 다루며 청와대 청원 및 평점 테러에 대해 언급했다.
실로 최근 한국 사회 내 젠더갈등은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7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청와대 국민청원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청원 홈페이지가 개설된 2017년 8월부터 2019년 5월31일까지 올라온 청원에서 20만명 이상의 답변을 얻어 청와대 답변이 이뤄진 98개 중 39.8%인 39개가 젠더 이슈였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남역 살인사건, 이수역 폭행사건, 대림동 여경사건 등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해서도 젠더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젠더 이슈와는 관계가 없는 고유정 살인사건까지 남녀 갈등 문제로 번지는 양상을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고유정을 두고 '여자라서 봐준다'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어김없이 성 대결 구도가 펼쳐져 버린 것이다.
젠더 갈등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사회적 문제가 됐다. 서로 다른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는 것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상대의 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는 분명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만 봐도 배우 정유미는 출연을 결정했다는 사실만으로 SNS를 가득 메운 악플 세례를 감수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 소설을 읽었다고 인증하거나 영화를 응원한 다수의 연예인들 또한 무차별적인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을 당했다.
올바른 성 인지 감수성 확립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친 인식 개선이 요구되는 상황.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젠더 문제를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데 사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모두가 같이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대결 양상으로 끌어내는 시각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82년생 김지영'의 경우도 "'페미니즘을 내세운 영화다'라는 타이틀 없이 제작됐다고 생각하면 전혀 그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나 앞서 책이 나왔을 때의 소모적인 논쟁들 때문에 영화도 동일한 시선을 받는 거다. 작품 자체의 내용을 보지 않고 영화에 씌워진 것들에 휘둘리는 점도 있는 것 같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젠더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건 나쁘지 않다. 다만 중도적인 위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새롭고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등 여러 관점이 공존하고 서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이어야 한다. '왜 내 생각과 다르냐'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또 그는 "오인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이걸 오인하지 않고 잘 풀어낼 수 있는 소통 과정이 중요하다"며 올바른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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