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29)] 글로벌 거래와 계약서

입력 2019-10-28 18:10   수정 2019-10-29 00:11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 대표부에 부임했을 때 이야기다. 주택을 임차하기 위해 집주인과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런데 주인이 준비해 온 임대차 계약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계약서가 10여 쪽이나 됐기 때문이다. 계약서에는 임대차인의 권리와 의무뿐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도 적혀 있었다. 가구와 집기, 정원의 나무와 관리 상태는 물론 벽지와 벽에 박힌 못의 수까지. 임차인은 주인 동의가 없으면 못 하나도 마음대로 박을 수 없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원래 상태 그대로 반환해야 했다. 약간의 손상이라도 있으면 임대보증금에서 비용을 공제함은 물론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했다. 그는 혼전계약서를 작성해 이혼에 따른 재산상의 손실을 줄였다. 미국법상 혼전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 이혼 시 배우자에게 재산의 절반을 줘야 하지만 작성한 경우에는 계약서에 근거해 재산을 분할하기 때문이다. 그는 저서 <억만장자 마인드>에서 성공 비결의 하나로 혼전계약서를 들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 전에 반드시 혼전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가 강조한 말이다. 계약서에 관한 동서양의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문화를 넘어서>라는 저서에서 세계의 문화를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하고 문화별 의사소통의 특징을 기술했다. 그에 따르면 의사소통이 문자나 말에 의존하는 부분이 적을수록 고맥락 문화, 클수록 저맥락 문화다. 고맥락 문화는 상황 의존도가 높다. 즉, 계약보다는 상호 이해관계와 상황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저맥락 문화는 상황 의존도가 낮다. 상황보다는 문서로 작성된 사실과 내용이 중요하다.

계약서 작성은 '철저' 이행은 '엄격'

계약서 작성 과정 및 준수에 대한 태도도 상이하다. 한국에서는 동업자 간 웃으면서 계약하고 싸우면서 헤어지며, 서양에서는 싸우면서 계약하고 웃으면서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그다지 신중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속된 말로 “됐나? 됐다”다. 또 계약서는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이며, 외부환경이 변화하면 융통성 있게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계약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철저한 조사 및 검토, 엄격한 확인 작업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계약서를 불빛에 비춰보는 독일인과 유대인은 이런 신중함을 상징한다. 서명하기 전 협상 과정에서 합의한 내용과 다른 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양쪽의 서류를 한 장씩 겹쳐서 불빛에 비춰 확인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명한 계약서는 엄격하게 이행된다.

아시아, 중동, 중남미는 고맥락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벼농사를 짓는 동아시아에서는 정착 생활로 인해 여러 면에서 공동체적 동질성이 높아 고맥락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척하면 아는’ 눈치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해상무역 등으로 이동이 잦은 서구에서는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문서로 상세 내용을 규정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이민국가에서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구성원 간의 관계를 말보다는 계약서에 의해 규율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에서 소송이 보편화되고 법률만능주의가 발달한 이유다.

구두합의가 계약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입증할 수만 있다면. 서구인들은 말로 하는 약속도 계약서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용사회에서 자신의 신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거래에서 상대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할 때까지는 구두로라도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구두합의도 추후 문서화해야

구두합의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의 일반적 심리적 특성인 ‘일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사람들은 믿음이나 행동에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욕구가 있다. 일단 구두로라도 약속하면 약속과 부합되게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법칙은 기업 마케팅에 활용된다. 예컨대 판매원들은 고객에게 “가격이 맞으면 오늘 가구를 구입하실 건가요?”라고 묻는다. 핵심은 가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가구를 사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일단 동의하면 심리적 부담을 느껴 구속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두합의는 불충분하다.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고 내용도 명확하지 않다. 서양 속담에도 ‘쉽게 약속하는 사람은 쉽게 잊는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구두합의를 한 경우에는 우선 이메일이나 메신저 서비스로 내용을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글로벌 거래에서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의사 표시를 하고 이를 문서로 정리해 서명하는 것이 오해와 분쟁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문서화된 약속은 계약서, 합의서, 약정서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서명 주체가 법적 권리와 의무를 인정하겠다는 의사가 확실하면 명칭과 관계없이 같은 법적 효력을 갖는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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