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민의 지금유럽은] 홍콩 민주화 시위에 등장한 '가이 포크스' 가면

입력 2019-11-04 09:17   수정 2020-02-02 00:02


지난 3일(현지시간) 홍콩 완차이에서 센트럴에 이르는 도심 지역에선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들의 시위가 22주째 이어졌다. 시위대는 ‘복면금지법’ 시행과 경찰의 집회 불허에도 마스크를 쓴 채 검은색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이날 최근 영화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조커를 비롯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를 썼다. 특히 영화 ‘브이 포 벤데타’로 유명해진 가이 포크스 마스크가 대거 등장했다.

가이 포크스는 하회탈처럼 웃는 하얀 얼굴에 짙은 콧수염의 가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이 포크스는 영국의 실존 인물이다. 1605년 11월5일 구교(천주교) 탄압에 대항해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궁을 폭파시키기 위해 화약 음모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다. 당시 국왕이던 제임스 1세와 의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의사당 지하실에 숨긴 화약통에 불을 붙이려던 순간 음모가 발각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가이 포크스는 이듬해인 1606년 다른 공범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영국 왕실에서는 음모가 수포로 돌아간 이날(11월 5일)을 기념해 왕의 건재함을 자축하는 불꽃놀이를 열었다. 이른바 ‘가이 포크스 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이 포크스 데이는 신·구교도를 막론하고 영국에서 누구나 즐기는 축제가 됐다. 신교 입장에선 위기를 모면한 왕을 위해, 구교들은 계획 실패를 아쉬워하며 불꽃놀이를 즐겼다.

이날은 ‘영국판 핼러윈 데이’로도 불린다. 영국 전역에선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가이 포크스 데이를 기념해 곳곳에서 불꽃축제가 열린다. 이 무렵 밤만 되면 런던 곳곳에선 대규모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가이 포크스 데이 당일인 11월5일엔 낡은 천과 가면으로 만든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태우는 축제가 영국 곳곳에서 열린다.

가이 포크스는 1980년대 만화 ‘브이 포 벤데타’가 출판되면서 저항의 상징이 됐다. 이어 2006년 미국에서 제작된 같은 이름의 영화로 인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독재 정권의 폭력과 압제에 맞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평범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2011년 금융 자본주의에 반대한 미국 뉴욕의 월가 시위였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에서도 사용됐다. 국내에서도 이 가면은 지난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에도 등장했다. 직원들은 사측의 집회 참여자 색출을 봉쇄하기 위해 이 가면을 쓰고 참석했다.

홍콩 정부는 지난 5일부터 공공 집회나 시위 때 마스크, 가면 등의 착용을 금지하는 복면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민주화 시위가 여섯 달째 이어지면서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홍콩 사태에 중국 공산당이 통제 강화를 공식화했다는 뜻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언론들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홍콩 집회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라지는 순간이 홍콩의 민주화가 이뤄지는 날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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