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중점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복지 정책인 ‘근로장려금(EITC)’은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제도다. 0~2세 무상보육도 그때 처음 시행됐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지낸 백용호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은 “MB 정부도 5년간 연평균 복지지출 증가율이 총지출 증가율을 웃돌 정도로 복지에 꽤 신경 썼다”며 “우파 정권은 복지를 억제해야 한다는 이념에 갇혀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이사장은 5일 한국경제신문과 진행한 인터뷰 내내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친(親)시장’ ‘성장 우선’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도 분배 정책에 힘을 줬듯이 현 정부도 ‘진보는 이래야 한다’는 강박에서 탈피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취약계층에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실제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문재인 정부 들어 소득 분배가 급격히 악화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대해선 “공공기관 부채가 많은 한국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출 증가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과잉 이념화로 경제 어려움 가중”
백 이사장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 국세청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시장주의자지만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균형감각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현 정부의 철학에 동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복지 지출이 굉장히 많이 늘었음에도 불평등이 커진 데 대해서는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의 명분이 좋다고 부작용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백 이사장은 특히 ‘과잉 이념화’를 우려했다. 그는 “경제 정책은 현실을 직시해서 써야 하는데 명분과 이념에 사로잡힌 것이 많다”며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이 있음에도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외면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외 경제학자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경제 기초체력이 약해지는 현상을 막으려면 노동유연성 강화와 신산업 규제 혁신이 시급하다고 지적하지만 현 정부는 개혁을 주저하고 있다. 백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가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김대중 정부가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점을 적극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 가격 개입은 절대 피해야”
재정 확대 정책에도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재정 정책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손쉬운 수단이지만 너무 확대되면 자산 가격이 급등하고 시장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채무가 급증해 경제에 부담을 주는 것도 문제”라며 “재정 확대가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고 증세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재정 일자리 확대 정책도 한계가 분명하다고 짚었다. 그는 “노인 취약 계층을 지원할 필요는 있지만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결국 노동시장 유연화와 규제 혁신이 중요하다”며 “때로는 잘 닦인 포장도로보다 험로를 택해야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백 이사장은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분양가 상한제는 단호하게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해서는 안 될 가장 큰 것이 인위적인 가격 개입”이라며 “시장에 엄청난 교란을 가져올 뿐 아니라 정책의 반사 이익을 취하려는 수요를 늘린다”고 말했다.
공정거래 정책에서도 지나친 시장 개입은 피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정책이 대표적이다. 백 이사장은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확대하는 것은 좋지만 어떤 형태의 지배구조를 꾸리느냐는 기본적으로 기업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기업도 그간의 행태를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백 이사장은 “반(反)기업 정서가 생긴 원인이 재계 내부에 없는지 진단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민준/고경봉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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