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평준화 정책을 보완하고, ‘강남 8학군’ 쏠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외국어고가 2025년 3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고교 교육과정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추구하기 위해 2001년 처음 세워진 자립형사립고(현 자율형사립고)도 문을 닫을 처지에 놓였다. 교육부는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과 함께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일괄 폐지해 ‘수직적’ 다양화 상태인 고교 교육을 ‘수평적’ 다양화로 재편하기로 했지만 학부모와 일선 교육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수평적 다양화가 곧 하향평준화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계속 나오고 있다.
‘조국 사태’로 정책 방향 급선회
자사고·외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된 사안이다. 하지만 애초의 구상은 완전 폐지는 아니었다. 설립 목적에 맞지 않게 운영되는 학교만 선별해 단계적으로 일반고로 전환할 계획이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시행령을 개정해 자사고 등을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다. “일괄 폐지는 공약과도 맞지 않는다”며 “시행령을 고쳐 일괄 전환하려 했다면 정부 출범 초기에 했어야 한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이 한영외고 재학 시절 대입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는 불공정한 입시의 원인을 자사고와 특수목적고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유 부총리는 지난 9월 30일 “(자사고 일괄 폐지에 대해) 열어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바뀐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교육부는 이후 약 한 달 만에 속전속결로 자사고·외고·국제고 일괄 폐지 계획을 밝히고, 일반고 혁신 방안을 내놨다. 공론화 절차는 물론 교원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없었다. 서울의 한 자사고 교감은 “정부가 조 전 장관 딸 사태를 계기로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며 자사고를 대입 공정성을 해친 주범으로 몰아갔다”며 “시행령 개정을 통한 일괄 폐지는 원칙도, 절차도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교육특구 부활 우려
교육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의 폐지 이유로 이들 학교가 설립 취지와 달리 입시 중심의 교육을 운영해 고교 서열화를 부추겼다는 점을 꼽는다. 자사고 등이 우수 학생을 선점해 일반고의 교육여건이 황폐화됐다는 주장도 펼친다. 하지만 살생부에 오른 학교 측 생각은 다르다. 일부 학교가 입시 위주 교육을 한 것은 맞지만, 재지정 평가를 통과한 학교들은 시·도교육청으로부터 설립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다고 ‘인증’받은 학교라는 것이다. 일반고 황폐화의 원인을 자사고 등으로 돌리는 것도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서울의 한 자사고 교감은 “서열화된 대학 체계,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제2의 자사고’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등장할 것이고, ‘잠자는 일반고’ 교실은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계획대로 2025년 일괄 폐지가 가능할지에도 물음표가 붙는다. 2025년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다. 현 정부에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일괄 폐지를 추진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다시 시행령을 고쳐 설립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사고·외고·국제고가 폐지되면 강남 8학군 등 교육특구가 부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가 대학수학능력시험 위주 정시 모집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대입 제도 개편 방향을 밝히면서 서울 대치동 학원가 인근의 아파트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학교·학부모 집단 반발
교육부의 자사고·외고·국제고 일괄 폐지 선언에 학교와 학부모는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자사고교장연합회(자교연)와 서울자사고학부모연합회(자학연)는 7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에서 “자사고와 특목고 일괄 폐지 정책을 즉각 철회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철경 자교연 회장(대광고 교장)은 “자사고 일괄 폐지를 강행한다면 교육 특구 부활과 함께 사교육 영향력이 더 막강했던 잘못된 과거로 회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수아 자학연 회장(숭문고 학부모 대표)은 이날 성명문을 통해 “이번 정권의 교육정책은 강북 지역의 공교육을 고사시키고, 강남의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여 사교육의 배를 불리는 최악의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조성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학교 제도와 운영을 법률로 정하도록 한 헌법을 훼손하는 처사이자, 학교 다양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라며 “국가 교육의 큰 틀과 방향은 시행령 수준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박종관/이주현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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