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의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최모씨(28)는 요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최근 있었던 회사 송년회를 자랑하느라 바쁘다. 송년회가 크루즈 내부의 파티룸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선상 파티’ 콘셉트였기 때문이다. 테이블마다 샴페인이 놓였고 직원들은 드레스코드인 빨강과 블랙에 맞춰 옷을 차려입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송년 파티장은 ‘클럽’이 됐다. 조명이 바뀌고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이 흘러나오자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돌 1세대인 H.O.T의 ‘캔디’ 등 1990년대 대중음악이 울려퍼졌을 땐 30대의 젊은 대표도 멋쩍게 나와 춤을 췄다. 최씨는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송년회도 직원들의 취향을 배려해준다”며 “선물을 교환하며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모든 직원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도록 신경 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가 송년회 트렌드도 바꾸고 있다. 삼겹살에 ‘소맥(소주+맥주)’을 쉼없이 들이켰던 고전적인 송년회는 점점 사라지고 크루즈·호텔 파티 등 젊은 직원들이 선호하는 ‘힙한’ 송년회가 뜨고 있다. 직원들에게 부담이 간다며 저녁 대신 점심에 송년회를 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술을 강권하는 회식을 거부하는 20~30대 직원이 늘었고, 주 52시간 근로제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고급 호텔 예약률 급증…크루즈는 만석
연말 송년회 장소로는 고급 호텔과 크루즈 파티장 등이 뜨고 있다. 젊은 사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주변에 자랑할 수 있는 이색적인 송년회를 꾸미기에 적합한 장소여서다. 더플라자호텔에 따르면 연말을 맞아 레스토랑의 단체 예약률이 전년 동기 대비 약 25% 높아졌다.
이달 들어 12월 예약을 받기 시작한 신세계조선호텔의 뷔페 레스토랑 예약률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된 뒤 회식을 길게 하는 분위기가 사라져 ‘주류 없는 점심 송년회’나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는 송년회가 늘었다”며 “서울의 고급 호텔들은 거의 예약이 끝났다”고 말했다.
크루즈 업체들도 호황이다. 이랜드그룹이 운영하는 이랜드크루즈의 한강 운항 유람선의 12월 예약률은 80%를 넘었다. 업체 관계자는 “한강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길 수 있고 안전 문제로 과도한 음주를 하지 않아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선상 파티룸 업체 관계자는 “연말까지 단체 예약이 꽉 찼다”고 귀띔했다.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액셀러레이터 퓨처플레이도 다음달 금요일 점심에 송년회를 연다.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저녁에 송년회를 했지만 시간대가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어 모두 모일 수 있는 점심에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2030 직장인 80% “이색회식 선호”
‘점심 송년회’, ‘파티형 송년회’가 늘어나는 것은 ‘부어라 마셔라’ 식의 전통적인 송년회에 대한 밀레니얼 세대의 거부감이 커져서다. 지난 11일 취업포털 사이트 인크루트가 아르바이트 앱 알바콜과 함께 20~30대 직장인 796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가 ‘회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로는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26%)’는 응답이 가장 많았으며 ‘자리가 불편하다(24%)’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가 회식을 무작정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응답자의 87%는 술자리보다는 ‘이색 회식’을 희망했다. 연극·영화를 보는 문화 회식(23%), 마사지 등을 받는 힐링 회식(21%), 볼링·골프 등 스포츠를 즐기는 레포츠 회식(16%) 순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는 공(公)과 사(私)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시간을 합리적으로 쓴다”며 “송년회는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지만 업무의 연장선인데 고압적인 분위기까지 견뎌야 한다면 거부감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에 송년회는 언감생심
송년회를 신년회로 대체하거나, 내년 송년회를 기약하는 곳도 적지 않다. 부진한 업황으로 연말에도 분위기가 쌀쌀한 곳들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S증권사에 다니는 20대 직원은 “올 한 해 증시가 지지부진한 탓에 회사 실적이 좋지 않아 연말 분위기가 안 난다”며 “지난해에는 이맘때 송년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올해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올해는 회사 차원에서 송년회를 하지 않고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송년회를 하지 않고 신년회 때 회식을 하기로 했다”며 “젊은 직원들이 회식을 기피하기도 하지만 비용도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노유정/김남영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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