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현 문화부 기자) 일흔을 앞둔 ‘첼로의 거장’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는 초등학생 장한나에게 종이를 한 장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펜을 들고 썼습니다. ‘한 달에 네 번 이상 연주하지 않기, 음악 안 하는 친구들과 놀기, 학교 열심히 다니기…’ 자신이 만난 어린 연주자들 중 ‘최고의 천재’라며 장한나를 아꼈던 그는 그 쪽지를 손에 쥐어주며 “보통의 삶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라”고 당부했다 합니다.
장한나는 스승의 말을 새겨 들었습니다.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해 최근 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장한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연주자들이 1년에 100차례 넘게 무대에 설 때 나는 40회 이상 연주한 적이 없었다”며 “무대에 서지 않는 시간에도 불안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무대에 안 설 때 오히려 다음을 준비하고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는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덜 했고 그러니 스트레스도 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장한나는 25년 전 로스트로포비치 첼로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열두 살일 때였습니다. 역대 최연소 우승자였죠. 그저 로스트로포비치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에 파리에서 4년마다 열리는 콩쿠르에 참가했다가 거둔 쾌거였습니다. 콩쿠르에서 연주가 끝난 후 로스트로포비치는 무대 뒤로 찾아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며 장한나를 번쩍 안아 올렸고 이후 후견인을 자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6년 EMI를 통해 첫 음반을 준비할 땐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먼저 제안을 하기도 했죠.
너무 어린 나이에 올린 성과에 장한나의 이름 앞엔 ‘신동’이란 수식이 붙었고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변의 요란스러움에도 스승의 조언대로 장한나는 자신의 페이스를 스스로 조정해 나갔습니다. 첼로를 놓진 않았지만 ‘보통의 삶’에도 충실했습니다. 연주에만 매달려 스스로를 혹사하지 않았고 음대가 아닌 하버드대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연주자에서 시야를 넓혀 지휘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2007년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페스티벌(SIYOF)을 통해 지휘자로 데뷔 무대에 선 후 어느새 10년이 넘었네요.
지난 13일 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은 지휘자로서 장한나의 실력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임동혁과 협연한 그리그 피아노협주곡도 좋았지만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은 장한나만의 색을 확연히 보여주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공연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장한나는 ‘비창’에 대해 “‘비창’을 처음 지휘한지도 10년이 된 것 같다”면서 “한 곡을 여러 번 반복하면 악보는 갈수록 선명해진다”고 표현했습니다. “악보를 보다 보면 10시간이 훌쩍 가버린다”는 그는 “악보와 보내는 시간의 양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다보면 ‘이 작곡가는 이런 의도였겠구나’하는 확신이 들 때가 있다고요. 다른 지휘자는 다른 ‘확신’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해석’의 차이라는 겁니다. 장한나는 “악보 속엔 수많은 규칙이 촘촘히 있지만 그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유를 알게 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휘자의 해석”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진한 웃음과 앳된 얼굴은 열두 살 그때와 똑같지만 지휘자 장한나의 말투는 자신감이 넘치고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연주자로서도 그랬지만 지휘자로서도 자신만의 음악적 철학이 굳건하기 때문이겠죠.
그는 “내가 추구하는 것은 아름답거나 풍성한 소리가 아니다. 모든 단원이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 그 순간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개인의 역량이 하나의 전체로 어우러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오케스트라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또 “음악가로서의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음악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는 게 내겐 큰 힘이 됐다. 첼리스트에서 지휘자가 됐지만 의문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내가 중요하다”고도 했습니다.
“‘다음 연주가 내 생각대로 안 된다면 더 이상 지휘를 하지 않겠다’고 매번 다짐하며 지휘대에 오른다”는 그가, 그 진지함과 치열함이 새삼 달리 보입니다. 지휘자로서 장한나의 행보를 기대를 품고 지켜봐도 될 듯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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