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에스퍼 장관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미국·필리핀 국방장관 회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연내 방위비 협상 합의가 무산되면 한반도에서 군대 감축도 고려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일축해왔다. 전날 서울에서 열린 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3차 회의가 미국 측 중단 선언으로 파행 끝에 종료된 이후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해 미국 외교·안보라인의 기류가 바뀐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이 카드를 한국 압박용으로 꺼내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와 관련,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지난 18일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한 뒤 20일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에 대한 한국 정부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美 전문가 "500% 인상 요구는 트럼프의 미군 철수 구실 찾기"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19일(현지시간)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열어놓은 듯한 모호한 답변을 한 것은 지난 10월 이후 진행 중인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의 방위비 증액을 이끌어내기 위해 양국 동맹 관계의 금기어인 ‘주한미군 감축’까지 거론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벼랑 끝 전술’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내년 한국이 내야 할 방위비 분담금을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로 책정해놓고 11차 SMA 협상에서 한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올해(1조389억원) 대비 여섯 배 가까이 많은 금액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50억달러에는 한국에 전개되는 전략자산 비용뿐 아니라 주한미군의 순환배치, 정찰기, 정찰위성 비용과 한·미 연합훈련에 드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통일안보센터장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기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이고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적 발언 같다”고 말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도 “전날 열린 양국 간 방위비 협상이 결렬된 직후 나온 발언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안보 전략 전환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8월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 탈퇴 이후 아시아 지역에 중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흐름이라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주한미군 병력 감축 시사는 중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포석일 수도 있다”며 “중국과 북한을 견제할 수 있는 억지력은 유지하되 방위비는 줄이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분석은 미국 내에서도 나온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트위터에서 “한국이 500%를 더 지불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거부당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도 미군 철수 구실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썼다.
미국 외교가에서는 한국에 무리한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날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엘리엇 엥겔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은 미 행정부가 한국에 50억달러 규모의 분담금을 요구한 데 대해 “사실이라면 동맹을 해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며 “매우 어리석다”고 말했다. 이어 “(방위비 협상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회 차원의) 성명을 발표할 수 있다”고 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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