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법안 통과율 최저
24일 정부와 국회에 따르면 올해 정부입법계획에 포함된 법안 237건 중 행정절차법 개정안,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 개정안, 국제금융기구에의 가입 조치에 관한 법 개정안만이 국회 문턱을 넘어섰다. 나머지 234건은 국회 상임위원회 등에 계류돼 있거나 아예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올해 정부가 발의한 법안은 155건이다. 정부는 예측 가능한 입법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매년 정부입법계획을 세워 관보에 고시한다. 정부 관계자는 “통상 연말에 몰아서 법안이 통과되는 경우가 많지만 올해는 유독 정부 법안 통과율이 저조하다”고 설명했다.
역대 정부 가운데 문재인 정부의 법안 통과율은 가장 낮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법안 662건 중 45.1%(301건)만이 국회를 통과했다. 김영삼 정부 97.8%, 김대중 정부 94.5%, 노무현 정부 81.8%, 이명박 정부 76.1%, 박근혜 정부 57.0% 등과 비교해 최저 기록이다.
대통령 공약 법안도 국회에서 ‘쿨쿨’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대표적인 정부 법안은 공인인증서 폐지를 골자로 한 전자서명법 전체 개정안이다. 공인인증서 폐지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9월 이 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는 지난해 11월 단 두 차례 회의에서 논의한 뒤 방치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공인인증서 발급 건수는 급증하고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따르면 지난해 4013만 건이었던 공인인증서 발급 건수는 올 들어 8월까지만 4108만 건을 기록했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5월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감감무소식이다. 개정안은 중소기업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창업투자회사의 창업·벤처 사모펀드(PEF)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의 PEF 불법 투자의혹 여파로 상임위 단계에서 진척되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인권기본법 제정 작업에 나서기로 했지만 위헌 논란 등으로 법안 발의조차 못하고 있다. 보수단체들은 “인권기본법은 차별금지를 명목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학물질 신고 시 물질의 구성 성분을 제출토록 한 화학물질관리법 개정안은 ‘규제 법안’으로 지목돼 국회 통과가 요원하다. 경제계는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내년 5월 20대 국회 임기가 끝날 때까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법안들은 폐기된다.
일 안 하는 국회…발의하고 뒷짐 지는 정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정쟁에 골몰하면서 정책 추진 환경이 더 악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 들어 국회는 본회의를 포함, 총 639번의 회의를 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655번 회의를 개최한 것과 비교해도 회의 수가 적다. 국회 회의는 여야 지도부와 상임위 간사의 합의로 열린다. 20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30.3%로, 접수된 법안 10건 가운데 7건은 처리되지 못했다.
정부는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입법 활동이 어렵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있었던 16대 국회에서도 정부 입법안 가결률은 80%를 넘어섰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각 부처는 국회 통과가 아니라 발의 실적으로 평가받는다”며 “법안을 발의해 놓고 뒷짐을 지는 건 일했다는 생색만 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입법 패싱’ 논란을 부른 정부의 ‘시행령 정치’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꼼수라는 지적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년4개월여 동안 공포된 시행령 건수는 2053건에 달한다. 정부가 이해관계가 첨예한 쟁점 법안을 개별 의원을 통해 ‘청부 입법’에 나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의원 입법은 법안 작성 후 10명 이상의 의원이 서명하면 국회 발의가 가능하지만, 정부 입법은 입법 계획 수립부터 입법 예고, 규제 심사, 국무회의 의결 등 다양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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