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가 깊어지면서 공장, 사옥, 영업매장 등 핵심 부동산을 내다 파는 기업이 급증하고 있다.
2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상장회사들이 올 들어 이달 20일까지 매각 공시를 낸 부동산 규모는 5조4692억원(78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2조5853억원, 42건)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영업실적 부진으로 재무구조가 나빠지자 자구 계획의 일환으로 부동산 매각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적 한파의 충격을 크게 받는 중견·중소기업의 부동산 매물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올 들어 코스닥시장 상장기업이 매각을 공시한 부동산 규모는 1조500억원에 달한다. 전년 동기 대비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양지다이어리로 유명한 문구류 제조업체 양지사는 다음달 말 서울 금천동에 있는 서울사무소 사옥을 1700억원에 매각하기로 했다. 이 회사 시가총액(1790억원)과 맞먹는 액수다. 양지사 관계자는 “보유 자산을 팔아 유동성을 확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명업체인 금호전기는 다음달 말 오산공장을 521억원에 팔 예정이다.
대기업 계열사들마저 핵심 부동산을 매물로 내놓고 있다. CJ그룹의 식자재 유통 및 단체급식 전문기업 CJ프레시웨이는 이달 말 보유하고 있는 7개 물류센터를 유동화해 1400억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신세계그룹 이마트도 13개 대형마트를 9524억원에 마스턴투자운용에 넘긴 뒤 재임차한다.
공장·사옥·매장까지 매물 쏟아져
불황 한파가 산업 현장을 강타하면서 기업들이 내놓은 부동산 매물이 쌓이고 있다. 국내 상장회사들이 올해 공시한 부동산 매각 물량(예정 포함)은 5조4692억원어치에 달한다. 작년의 두 배 이상이다. 이들 기업의 상당수가 재무구조 개선을 이유로 꼽았다. 유휴부지와 사옥뿐 아니라 공장, 영업매장 등 핵심 부동산까지 줄줄이 매물로 내놓고 있다.
유동성 악화에 부동산 매물로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관리하는 한진중공업은 지난 8월 인천 율도 부지(1314억원)를 처분한 데 이어 최근엔 서울 동서울터미널 및 주변 부지 매각(예정가격 4025억원)을 추진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8월 롯데백화점 강남점 등 10개 매장을 롯데리츠에 1조629억원에 판 뒤 이 리츠를 지난달 말 상장시켰다. 비상장사 중에선 부영주택이 서울 을지빌딩을 더존비즈온에 매각해 4562억원을 손에 쥐었다.
이처럼 기업들이 부동산을 팔면서 서울 사무용 빌딩 거래량은 증가했다. 부동산서비스업체 교보리얼코에 따르면 올 1~9월 서울 사무용 빌딩 거래금액은 7조614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3% 늘었다.
실적 부진으로 현금흐름이 나빠지자 부족한 유동성을 충당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동산을 내다 파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579곳(금융회사 등 제외)의 올해 1~9월 누적 영업이익은 82조161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8.7% 감소했다.
곳간의 현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집계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비금융사 529곳)의 연결 재무제표 기준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296조900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말 289조원으로 줄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주) 등 매출 규모 기준 상위 10개 기업의 지난 3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154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말(160조4000억원)보다 5조원 이상 감소했다. 영업실적 부진 여파로 재고자산은 같은 기간 95조1000억원에서 102조4000억원으로 증가했다.
암울한 경기 전망…“매물 늘어날 것”
경기 하강이 이어지면서 내년에도 기업들의 부동산 매물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주요 경기지표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미·중 무역갈등과 홍콩 사태 등 글로벌 무역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 경제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해 내년에는 더 많은 한국 기업이 재무구조 악화로 신용등급 하락 위험에 내몰릴 것이란 경고를 하고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통신, 유통, 정유, 화학 등 국내 주요 업종의 내년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긍정적으로 전망한 업종은 하나도 없다. 이 신용평가사는 현재 신용등급을 부여한 한국 기업(금융사·공기업 제외) 24곳 중 절반이 넘는 14곳의 신용도에 부정적 전망을 붙였다. 지난해(5곳)보다 세 배 가까이로 늘었다.
초저금리 시대에 진입하면서 대체투자 자산인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기업들이 쉽게 부동산을 팔아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할 유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대형 증권사 부동산금융담당 임원은 “소유권을 넘기기 싫다면 리츠처럼 부동산을 증권화해 일부만 매각하고, 처분 대상 부동산을 활용한 영업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면 매각 후 재임차 조건을 넣을 수 있다”며 “불황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방법으로 부동산을 활용해 재무구조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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