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대통령제, 우리 몸에 맞는 옷일까

입력 2019-11-28 17:49   수정 2019-11-29 00:19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인가. 후보 시절 ‘다 내려놓겠다’던 공언이 권력을 쥐고 나면 공염불이 된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에게 권력을 줘보라”는 링컨의 경구가 확실히 입증된 나라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중심의 ‘제왕적 승자독식’은 그렇게 강화돼 왔다. 대통령 권한은 실로 막강하다. 헌법상 유권자 3분의 1 이상을 득표해 당선되면 5년간 ‘국가원수’로 군림한다. 3만 개 공직 임명권도 갖는다. 인기 없고 무능해도 대개는 끝까지 간다. 임기 중 국정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일이 되풀이된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지만 실상은 정치권력이 커진 만큼 국민은 왜소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제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G20(주요 20개국) 멤버인 세계 12위 경제대국에 대통령제가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이다. 사화(士禍)를 방불케 하는 정치보복과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은 국격(國格)의 문제다. 세계가 달려가는데 5년마다 극단적 스윙과 ‘대못’ 박고 뽑기가 되풀이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안으로 종종 내각제가 거론된다. 입법·행정의 정치적 책임이 명확하고, 언제든 선거로 재평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고생도 아는 상식이다. 사실 선진국 중에 내각제가 아닌 나라가 드물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후보시절 내각제 개헌을 언급한 바 있다.

내각제만 되면 갈등과 불임(不姙) 정치가 해소될까. 4·19~5·16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민도가 높아져 수용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내각제 장점만 부각시켜 대통령제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60년간 익숙해진 틀을 바꿀 때의 혼란을 감안하면 차라리 대통령제를 고쳐 쓰는 편이 낫다.

민주주의에는 정답이 없다. 나라마다 뿌리 깊은 역사·문화적 배경이 있다. 그리스 등 유럽 PIGS 국가들도 다 내각제이고, 일본은 아베 총리 이전 5년간 총리가 6명이나 바뀌었다. 케네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처럼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소위 범여권이 정치개혁을 명분 삼아 선거제 개편을 밀어붙이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깝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군소 정당들의 노회한 맹주들에게는 유리하겠지만 권력 분산과는 전혀 무관하다. 제왕적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치개혁을 하랬더니 ‘대통령제+다당제’라는 희한한 구도를 만들어 놨다. 권력을 분산하고 싶으면 대통령부터 내려놓으면 된다. 대통령 직속에 감사원도 모자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까지 두는 게 무슨 분권형 정치개혁인가.

한국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견제장치가 고장난 탓이지, 선거제 탓이 아니다. ‘하명 수사’와 유재수 사건이 왜 벌어졌겠는가. 제왕적 권력을 견제해야 할 국회, 사법부, 수사·사정기관, 언론 등이 되레 권력 주변에 동심원을 그린다. 지식인이라 할 교수 사회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그렇다고 김수환 추기경 같은 원로가 있기나 한가.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미국은 사법부가, 독일은 관료시스템이 확실히 나라의 중심을 잡는데 우리나라는 무제한의 민주주의와 권력 폭주에 제동을 걸 장치가 안 보인다”고 지적한다.

국가 정치체제는 제도 자체보다 그 운용이 관건이다. 축적된 관행의 문제다. 2020년대가 코앞인데, 총선 정치공학과 복지 청구서, 재정 구멍 나는 소리만 요란하다. 새로운 10년에 대한 미래 담론은 아예 실종됐다.

현대국가는 철인(哲人)이 아니고선 홀로 이끌어 갈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도 제대로 써야 한다.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나라가 망하는 비극은 인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재가 있어도 그 활용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고 했다. 대통령의 지력(知力)이 곧 국가의 지력인 시대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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