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공무원의 '낙지부동'과 중기 현장의 한숨

입력 2019-12-04 18:20   수정 2019-12-05 00:19

욕실 업체 A사는 몇 년 전 화장실 층간소음을 방지할 수 있는 배관 시스템을 개발했다. 아래층 천장에 배관(층하배관)을 설치하는 대신 위층 바닥에 배관(층상배관)을 넣어 층간소음을 대폭 줄이는 방식이다. ‘장수명 주택 건설 및 인증기준’에는 콘크리트 슬래브(층) 두께를 줄이지 않는 층상배관을 설치할 경우 소음 관련 최상등급을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주택건설에 관한 규칙’에서는 층하배관만 언급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법규에 모호하게 규정돼 건설사들은 층상배관 도입을 꺼리고 있다. A사는 정부에 호소했지만 아직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기계설비 업체 B사는 최근 공사 현장에서 작은 사고가 생겼다. 담당 공무원은 즉시 공사중지 명령을 내렸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현장은 10여 일 동안 문을 닫았다. 일용직 근로자를 포함해 다수가 원하지 않은 임시 휴가를 갈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 사고 내용을 확인한 뒤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는데도 원리원칙만 고수한 탓이다.

중소기업 현장에서 생기는 어려움이 늘어만 간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제 도입, 내수 침체 장기화 등도 문제지만 여전히 꽉 막힌 관공서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규정만 따지다 보니 한숨이 나온다는 게 중소기업인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공무원들이 ‘적극 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다. 적극 행정은 공무원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는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노력이나 주의 의무 이상을 기울여 맡은 바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행위, 업무 관행을 반복하지 않고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업무를 처리하는 행위’를 적극 행정의 예로 들고 있다.

이와 함께 신기술 발전 등 환경 변화에 맞게 규정을 적극적으로 해석·적용하는 행위, 규정과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지만 가능한 해결 방안을 모색해 업무를 추진하는 행위도 적극 행정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국무조정실과 ‘중소기업 활력 증진 및 규제 혁신을 위한 적극행정 확산 업무협약’을 맺은 데 이어 전국 13개 지역 본부에 ‘적극행정 소통센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정부 부처는 중소기업이 마주치는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인은 “공무원들이 기업인의 제안을 들어보고 안 되는 요인들을 제거해 주면 되는데, 다수의 공무원은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지적하는 데 그친다”고 했다. 이 같은 행태에는 ‘괜히 나섰다가 나중에 덤터기만 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한 기업인은 현장 공무원의 태도를 복지부동에 더해 낙지가 빨판을 바닥에 붙이고 엎드려 있는 모습에 빗대 ‘낙지부동’으로 표현했다.

공무원이 기업인과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것도 문제다. 한 기업인은 “공무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모든 기업인과의 만남 자체를 불순하게 여기는 경향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는 현장과 동떨어진 정부 정책을 양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벌써부터 내년 경영환경 악화를 우려하는 중소기업인이 적지 않다. 이들이 지금까지 버텨온 힘은 회사를 키우고 직원과 상생하려는 기업가 정신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적극 행정이 현장에서 더 활성화된다면 움츠린 기업인의 기업가 정신도 다시 꿈틀거리지 않을까.

tru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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