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점을 안 게 25년 됐어요. 저는 여기 녹두전을 참 좋아하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먹음직스러운 전라도 한정식이 한 상 차려지기 시작하자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67)이 살갑게 식사를 권했다. 음식을 내오던 음식점 사장은 “(신 회장은) 1994년부터 우리 손님”이라고 반갑게 맞았다. 그는 한번 단골집으로 정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머리 손질도 20년째 같은 이발사에게 맡기고 있다. “원래 생명보험업계 사람들이 인연을 맺으면 오래갑니다.”
2017년 12월부터 생명보험협회를 이끌고 있는 신 회장은 마흔 넘어 보험업계에 발을 들인 ‘늦깎이 생보맨’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1994년 교보생명에 입사해 기획, 재무, 영업 등 여러 분야를 거쳐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친정을 떠난 뒤에는 KB금융그룹에 영입돼 KB생명 사장도 지냈다.
원칙 지키는 지독한 ‘아침형 인간’
칼바람이 불던 지난 19일 저녁, 신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운니동의 한식당 ‘송죽헌’. 톡 쏘는 향이 올라오는 홍어찜을 비롯해 전복구이, 차돌박이볶음, 모둠전 등 푸짐한 전라도 한정식을 차분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신 회장은 충남 천안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서울대를 나와 미국 유학도 다녀온 ‘고(高)스펙’이니 유복하게 자랐을 것 같다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저 깡촌놈이에요. 고향 집엔 1972년에야 전기가 들어왔고요. 보릿고개에 모내기, 밭매기…. 푹푹 찌는 지열을 견디면서 콩밭 매 보셨어요? 농사짓는 게 힘든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귀농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웃음)”
비슷한 연배의 기업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신 회장도 지독한 ‘아침형 인간’이다.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면 일어난다.
“어릴 적엔 기차를 타고 통학했어요. 걸어서 20분 떨어진 기차역엔 아침, 점심, 저녁 딱 세 번 기차가 다녔습니다. 오전 6시5분 출발하는 차를 타지 않으면 중학교에 갈 수 없었어요. 그때 몸에 밴 습관이죠.”
어색한(?) 사진 촬영 시간이 끝나자 신 회장은 홀가분하다는 듯 재킷을 벗고 소주 한 잔씩을 돌렸다. 투박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특유의 친화력이 시동을 걸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보게 돼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내·아들 데리고 무작정 떠난 유학길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72학번인 그는 한동안 보험과 무관한 길을 걸었다. 첫 직장은 해운업체 조양상선. 재무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춰야겠다는 갈증이 생겼다. 유학을 결심하고 다짜고짜 미국 대학들에 지원서를 보냈다. ‘석사학위는 없지만 열심히 공부할 테니 장학금을 달라’는 ‘뻔뻔한’ 요구도 곁들였다.
“받아본 쪽에선 ‘웃기는 놈’이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웬일로 조지아주립대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죠.”
아내를 설득해 전세금을 빼 바로 떠났다. 큰아들이 두 살, 작은아들은 100일을 갓 지난 때였다. 무작정 시작한 미국 생활은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발음이 통하지 않아 ‘밀크’ 한 잔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고, 경영학 교재에 나오는 모든 영어 단어는 라틴어처럼 생경했다.
좋아하던 술도 끊고, 중학교 때 생활로 돌아갔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가서 경영학에 매달렸다. ‘1년 안에 되돌아온다’고 놀리던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재무학 박사를 따서 돌아온 것은 6년 후였다.
“세상에 ‘거저’와 ‘비밀’은 없더라”
불혹을 넘어 교보생명에 기획 담당 이사로 합류한 그는 매년 새로운 보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신 회장은 보험을 전혀 몰랐던 자신에게 다양한 기회를 준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를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꼽았다. ‘세상에 거저와 비밀은 없다’라는 신 회장의 삶의 원칙도 신 창업주가 생전에 그에게 해준 말이다. “살아보니 그 말씀만큼 진리 중의 진리는 없더라고요.”
외부 인사가 사내에서 승승장구하면 적지 않은 ‘견제’에 시달렸을 법도 하지 않을까. 신 회장은 회사생활에서 두 가지를 철칙으로 삼았다.
“좋은 관리자의 조건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째, 인사를 학연이나 지연 같은 인연에 연결시키지 말 것. 둘째, 회삿돈은 투명하고 정직하게 쓸 것.”
생명보험업계에서 신 회장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인 의리파’로 요약된다. 그는 생명보험협회에서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서를 싹 없앴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는 지론 때문이다. 교보생명 시절에는 영업실적이 좋지 않은 직원들과 식사나 등산을 따로 하며 다독이고 격려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쓴 직원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KB생명을 떠나면서 휴대폰 충전기 같은 사소한 집기조차 본인 소유가 아닌 것은 꼼꼼히 가려내 남겨둔 일화도 있다. “두 아들이 첫 출근을 하는 날도 신신당부했습니다. 너는 몰라도 세상은 다 널 보고 있으니 정직하라고. 세상에 비밀은 절대 없다고.”
“생명보험사의 노력 인정해 달라”
신 회장은 생명보험회사들을 대표해 업계와 금융당국, 소비자, 언론 등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맡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승승장구했던 생명보험산업은 요즘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시장이 포화상태인 데다 규제는 강화되고 있고, ‘민원이 많은 산업’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생명보험을 둘러싼 일각의 오해에 대해 억울한 것은 없느냐’고 묻자 신 회장은 할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기자에게 “스웨덴 작가 한스 로슬링이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를 읽어봤느냐”고 되물었다. 이 책은 왜 사실과 다른 오해가 많은지를 다룬 베스트셀러다.
신 회장은 “생명보험사들은 연간 890만 건(2017년 기준)의 보험금을 지급한다”며 “이 중 청구 3일 안에 지급된 것이 94.5%, 10일 안에 지급된 것이 98.5%”라고 했다. 그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이번엔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여러 조사를 거쳐 0.08%에 해당하는 7000건 정도만 민원으로 넘어갑니다. 단지 그 0.08%만 보고 ‘생명보험사는 어지간하면 보험금을 안 주려 하고, 그래서 늘 민원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지나친 오해 아닌가요?”
국내 생명보험사들의 총자산 700조원 중 약 25%는 연 5% 이상의 고금리를 지급하기로 약속돼 있다. 신 회장은 “생명보험사의 재무에는 상당한 부담이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남도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잔을 부딪치면서도 신 회장은 협회장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았다. “생명보험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해에도 생명보험업계를 위해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 한국의 생명보험 산업은
생명보험은 여러 금융업 중에서도 고용 효과가 크고 많은 소비자와 밀착된 대표적인 영역으로 꼽힌다. 국내 생명보험회사는 총 24개. 지난 9월 기준 2만5421명의 임직원을 고용하고 있고, 10만9696명이 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보유하고 있는 보험 계약은 8254만 건에 이른다.
생명보험사들은 소비자에게서 거둔 보험료를 투자로 굴려 이익을 내는 구조다. 하지만 초저금리가 굳어진 데다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도입을 앞두고 자본금을 대폭 확충해야 해 재무 부담이 큰 상황이다. 업체들은 보험에 정보기술(IT)을 결합한 ‘인슈어테크’와 해외 진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은 “‘숨은 보험금 찾아주기’ 캠페인을 통해 연간 2조원 넘는 미청구 보험금을 소비자에게 찾아주고 있다”며 “생명보험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 약력
△ 1952년 충남 천안 출생
△ 1971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 1976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 1990년 미국 조지아주립대 재무학 박사
△ 2002~2006년 교보자동차보험 사장
△ 2008~2013년 교보생명 사장
△ 2011~2013년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 2015~2017년 KB생명 사장
△ 2017년~ 제34대 생명보험협회장
■ 신용길 회장의 단골집 송죽헌
계절 따라 요리 다른 한정식집…대표 메뉴는 전라도식 추어탕
서울 운니동에 있는 송죽헌은 1988년 문을 연 남도 한정식집이다. 독립된 방 7개를 갖추고 있어 모임 장소로 추천할 만하다. 이면도로에 있는 단독주택 2층 건물이라 주위가 조용하다.
한정식답게 계절에 따라 요리 종류를 조금씩 바꾼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굴, 방어, 민어, 꼬막, 낙지 등을 활용한 요리가 늘어난다. 봄에는 봄나물과 죽순채, 여름에는 삼계탕, 가을에는 버섯류를 중심으로 제철 음식을 선보인다. 김혜영 사장은 “전라도식으로 끓인 추어탕이 맛있다는 얘길 가장 많이 듣고, 민어찜과 낙지요리도 자신있다”고 소개했다.
정통 전라도 한정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서울 입맛’도 일정 부분 반영했다. 홍어를 과하게 삭히지 않아 향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예전엔 젓갈도 풍성하게 냈는데, 짠 음식을 꺼리는 손님이 늘어 비중을 줄였다고 한다.
점심에는 3만원짜리 정식과 함께 추어탕, 콩비지찌개, 북엇국, 낙지볶음, 제육볶음 등의 단품 요리를 판다. 저녁 정식은 4만원, 6만원, 8만원짜리가 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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