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영 "자신과의 싸움 다시 시작…또 얼마나 스스로 몰아붙일지 걱정돼요"

입력 2020-01-02 17:28   수정 2020-01-03 00:26


최근 미국 골프채널은 새해를 앞두고 ‘2020년 지켜봐야 할 골프 선수’ 13명을 선정했다. 명단을 통틀어 여자 선수는 단 두 명. 그중 한국인은 고진영(25)이 유일했다. 명실상부 2019년 가장 빛났던 여자 ‘K골퍼’다. 세계랭킹 1위에 오르고 메이저대회를 두 차례나 평정했으며, 다가오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2년차인 지난해 이룬 성과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듯했다. 최근 한 시상식장에서 만난 고진영은 “아직도 해야 할 게 남은 것 같다”며 “그래서 스스로 70점밖에 주지 못하겠다”고 했다.

“올 목표도 성적 아니라 나 자신”

프로는 돈으로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100점짜리 성적표다. 그는 메이저 2승(ANA인스퍼레이션·에비앙챔피언십) 등 4승, 올해의 선수, 상금왕, 평균타수 등 주요 타이틀을 모두 싹쓸이했다. 지난해 벌어들인 상금만 277만3894달러. 우리 돈으로 32억원이 넘는다. 국내에서 우승한 하이트진로챔피언십 우승상금 2억원에 스폰서 인센티브 등을 합하면 ‘실수령액’은 이를 훨씬 웃돈다.

고진영은 “기록은 어차피 올라갔다가 내려가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 70점을 준 이유도 100m 이내 샷이 좋아졌고 거리도 작년보다 늘어서였다. 그는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고 싶은 게 우선”이라며 “그럼 (성적도) 당연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진영은 그의 말대로 성적이 아니라 자신과 싸웠다. 지난 4월 ANA인스퍼레이션에서 우승하고 처음 세계랭킹 1위에 올랐을 때였다. 고진영은 강행군 속에 체력이 달렸고 스윙이 급격히 흔들렸다. 급기야 7월에는 12주간 지키던 세계 1위 자리를 잠시 내줬다. 슬럼프가 길어지지 않도록 시즌 중 하루 12시간씩 연습했다. 당시 그는 “오전 6시에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저녁 6시까지 공을 쳤다”며 “공을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7월 29일 세계랭킹 1위에 복귀했고 이후 23주간 한 번도 세계 최고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빚 갚으려 앞만 보고 달렸다”

지금의 고진영을 만든 건 넉넉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다. 앞만 보고 달려와 ‘독하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지난 10월 올해의 선수상 확정 기자회견에서 먼저 ‘빚’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프로 데뷔 후 5·6승을 거둘 때까지도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부유하지 않았으니까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당시 ‘어떻게 유년 시절을 보냈나’는 질문이 나와서 갑작스레 털어놨어요. 부유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도와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동안 제가 왜 그렇게 독하게 경기를 했는지 오해도 있었잖아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오해를 풀고 싶었거든요.”

미국에서의 생활은 강행군 속에서도 그에게 여유를 선물했다. 예전에는 목표에 쫓기는 듯 보였다면, 이제는 목표가 자신을 따라오도록 만든 듯 보였다. 골프를 시작하면서 정했던 다섯 가지 ‘골프 인생 목표’도 그는 까먹은 지 꽤 됐다고 털어놨다.

“책을 보다가 석 달 안에 죽어야 한다면 하고 싶은 열 가지를 적어보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섯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구나’라고 그때 깨달았죠. 어떻게 하면 삶의 질이 더 좋아질 수 있을지, 이런 것들만 생각한 것 같아요.”

올해도 목표는 성적이 아니라 고진영 자신이다. 12월 한 달간 푹 쉰 고진영은 이달 초 미국으로 출국해 이른 전지훈련에 돌입한다. 고진영은 “대회 땐 안 그런데 훈련 때는 끝까지 스스로 몰아붙인다”며 “솔직히 또 얼마나 나 자신을 혹사시킬지 걱정된다”고 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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