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민주주의는 이렇게 무너진다

입력 2020-01-07 18:24   수정 2020-01-08 00:25

“법원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우고 차베스가 14년간의 장기독재를 시작했던 1999년 2월 당시 베네수엘라 대법원장 세실리아 소사가 사임하며 한 말이다. 법원을 포함해 국가의 모든 기관을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갖겠다는 ‘철권’ 차베스의 횡포에 사법부 수장이 굴복한 뒤 두 달 만에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해산됐다.

약체의 새 대법원이 들어섰지만 성에 차지 않은 차베스 정권은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해 더 강력한 방법을 썼다. 2004년 대법원 판사를 20명에서 32명으로 확 늘려버린 것이다. 늘어난 12명이 어떤 성향이었는지는 물으나 마나다. 이때부터 차베스가 암 투병으로 대통령직을 내놓게 된 2013년까지 9년간 이 나라 대법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미국 하버드대의 두 정치학 교수가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이런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경쟁자를 매수하거나 탄압하며 독재체제를 굳히는 것은 베네수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법원과 언론은 늘 독재 권력의 우선 포섭 대상이면서 공격 상대다. 남미 좌파벨트의 이웃인 페루에서도 알베르토 후지모리 집권 때 이런 일이 일상사였다. 정보기관 수장의 주된 업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왠지 낯설지 않다.

정당의 무력화와 무시되는 법치주의, 선거를 치를 때마다 더 부풀어오르는 포퓰리즘, 앞뒤 안 가리는 무차별 복지 경쟁, 보편적 규범의 붕괴, 극단주의자들의 발호와 유권자의 민주시민 책무 포기…. 이런 게 쌓이고 반복되면서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혁명이 아닌 한 대부분 겉으로나마 ‘합법적’ ‘다수결’ ‘입법화’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도 경계할 대목이다.

민주 규범의 해체, 민주주의 붕괴의 그늘은 짙고 깊으며, 길게 간다. 지금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딱 그렇다. 수백만%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경제가 ‘폭망’한 데 이어 야당이 20여 개로 난립하며 정치도 혼란에 빠진 베네수엘라는 대통령도 둘, 국회의장도 둘이 됐다. 수뢰혐의의 친정권 인사를 국회의장으로 뽑는다며 야당의 국회 진입을 봉쇄한 니콜라스 마두로의 폭거가 어디까지 갈지 관심사다. 인구 2800여만 명인 나라에서 탈출자가 650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토양에서 경제라는 나무가 자랄 수는 없다. 한국의 민주 규범과 민주적 질서는 과연 안녕한가.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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