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세계적으로 논의가 활발한 ‘디지털세’가 한국에 주는 영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고래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새우는 한국을 비롯한 중진국이다. 중진국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해졌다.
지난 27~30일 국제사회 논의 결과 소비자를 상대로 한 제조업 기업에까지 디지털세를 물리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당초 구글 페이스북 등 ‘정보기술(IT) 공룡’을 주된 타깃으로 하던 데서 적용 대상이 크게 넓어진 것이다. 이로써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다국적기업도 디지털세 적용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됐다.
삼성, LG 등 디지털세 과세될 듯
구글, 페이스북 등 다국적 정보기술(IT) 기업은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지만 각 나라에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고정사업장’이 없는 나라에선 법인세를 거둘 수 없다는 국제조세 원칙 때문이다.
IT 기업은 ‘서버’가 고정사업장인데, 구글 등은 싱가포르처럼 세금이 낮은 나라에만 서버를 두고 있다.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세금을 거의 안 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IT 다국적기업의 얌체 관행을 막기 위해 고정사업장이 없는 나라에서도 세금을 내게 하자”는 게 디지털세의 목표다. 그간 디지털세 논의는 EU가 미국에 공세를 가하는 흐름이었다. 세계적 IT 기업은 대부분 미국 기업이어서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런 흐름이 바뀌었다.
미국이 “제조업 다국적기업에도 디지털세를 적용해야 한다”며 전선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최근엔 제조업 기업도 인터넷과 SNS 등 디지털 환경을 활용해 마케팅을 벌이고 이익을 얻는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미국의 뜻은 관철됐다. 지난 30일 다국적기업 조세회피 방지대책(BEPS)의 포괄적 이행을 위한 다자 간 협의체(IF·Inclusive Framework)는 소비자 대상 사업(B2C)을 영위하는 제조업 기업에도 디지털세를 물리기로 합의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간재·부품 판매업(B2B)이나 금융업, 운송업 등은 디지털세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휴대폰, 가전 부문은 디지털세 과세 대상이지만 가장 핵심인 반도체 부문은 빠졌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 정부 피해 최소화해야”
디지털세를 어떻게 얼마나 거둘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과세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현재 한국에서 주로 세금을 내지만 앞으로는 영국 등 해외에서 올린 매출의 일정한 비율(가령 20%)에 대해 현지 과세당국에 세금을 내야한다. 그만큼 한국에 내는 세금은 줄어드는 식이다. 해외 매출의 20%는 디지털 환경의 도움을 받아 올린 ‘초과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제조업 기업은 해외에 대부분 물리적인 고정사업장을 두고 있는데도 디지털세를 내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 수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 부분은 아직 논의가 정리되지 않았지만 고정사업장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디지털 환경의 혜택을 본다면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고 전했다.
다만 디지털세 시행으로 삼성, LG, 현대차 등의 총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세는 다국적기업의 세금을 어디서 더 거두느냐의 문제여서다. 즉 삼성전자나 구글이 현재 세계에서 내는 세금이 100이라면 그 가운데 얼마를 외국에서 떼이느냐를 결정하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디지털세가 시행되면 국내 세금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대기업으로선 세수 부담에 변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은 분명하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그간 안 내던 세금을 내게 되는 것이어서 납세협력비용, 연구비, 인건비 등 추가 비용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국제 논의에서 이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IF는 올 7월 총회를 열어 구체적인 과세 기준 등을 결정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한국과 비슷한 국가와의 연대 등을 통해 한국 기업과 정부 재정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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