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하고 자유로운 국가였다. ‘남미의 오아시스’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이 칠레일 만큼 개방된 경제였고, 국제사회의 신뢰도 대단했다. 필자가 2002년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칠레는 한국과 신용등급이 같았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와 같은 신용등급이라니 언뜻 이해도 안 되고 자존심도 상해서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에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칠레가 한국보다 외국인 투자에 더 친화적이며 각종 정보나 통계도 훨씬 투명하단다. 여기에 자원마저 풍부하다. 전 세계 구리 매장량의 35%를 보유하고 있으며, 농축산물 생산량의 90% 이상을 수출했다. 칠레는 성장의 꽃길을 걷는 남미의 모범 국가였다.
그러던 칠레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저앉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주요 수출품이던 구리 가격의 폭락이 계기였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좌파 정부의 복지 포퓰리즘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칠레의 좌파 정부인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은 2006~2010년, 2014~2018년 정부 주도로 대규모 공공서비스 확대 정책을 시행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교육까지 공짜로 받게 했다. 달콤한 명분을 내세워 의료, 주거보조금 예산도 확 늘렸다. 당시 공공지출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의 세 배가 넘었으니 재정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천문학적인 복지 비용을 법인세 인상으로 충당하려 했다. 20%였던 법인세율을 27%까지 올렸다. 친(親)노동 정책이 추진됐다. 파업 중 대체 근로를 금지하고 해고 요건은 대폭 강화했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려 실질임금 상승률은 50%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런 반(反)기업 친노동 정책은 국제사회의 외면을 불렀다. 외국인직접투자는 2014년 238억달러에서 2017년 58억달러로 4분의 1 토막 났다. 경제성장률도 급락했다. 연평균 5.3% 성장하던 경제가 연평균 1.7%까지 주저앉았다. 반세기 동안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번성하던 칠레의 경제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더 암울한 것은 포퓰리즘 병이 거의 불치병 수준이라는 점이다. 2018년 칠레판 트럼프로 불리던 피녜라가 집권하면서 이 병을 고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하철 요금을 겨우 50원 올렸다가 극심한 혼란만 일어났다. 칠레는 기업과 중산층이 붕괴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커지며 무너지고 있지만, 이젠 어떤 치료제도 쓸 수 없는 안타까운 상태다.
칠레의 사례는 과연 남의 일일까? 칠레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선심성 복지 급증과 이에 따른 근로 의욕 감소, 무리한 재정 확대, 급격한 임금 인상,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법인세 인상, 외국인투자와 경제성장률 감소 등 지금의 한국과 너무나 똑같다. 어쩌면 우리 상황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원 부국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고령화 국가이니 말이다. 잠재성장률도 급락 중이다. 이대로 포퓰리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올해 우리나라 재정수지 적자는 선진국에서 권고하는 건전재정 기준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3%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나랏빚은 700조원이 넘었건만 국세 수입은 법인세를 빼고 모두 감소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곳간에 작물을 쌓아두면 썩는다”며 개선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제 다음 행보는 칠레처럼 뻔하지 않겠는가. 부족한 재정을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서 채우려 할 것이고, 투자와 일자리는 감소하고, 경제는 점점 나빠질 것이다. 지금 당장 이 지독한 포퓰리즘 늪에서 나와야 하는데, 안타까워 가슴만 답답해진다. 부디 총선을 앞둔 대한민국이 ‘칠레의 경고음’을 심각하게 듣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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