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은 ‘신뢰 중개업’으로 불린다. 시장이 판매하려는 상품을 얼마만큼 신뢰하는지를 계량하는 게 금융맨들의 핵심 업무다. 보통 ‘과거의 데이터’를 도구로 활용한다. 주가연계증권(ELS)의 수익률이 정기예금의 두 배가 넘는 것도 데이터 분석의 결과물이다.
금융업에 오래 종사하다보면 ‘의심병’ 환자가 되기 마련이다. 팔아야 할 상품에 파악하지 못한 잠재적 위험이 있는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수단이 확실한지 등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된다. 업무 프로세스 단계 중 하나인 ‘의심’을 업무의 ‘목표’로 여기는 금융맨들도 허다하다. 은행 같은 곳에선 직원들의 의심병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문제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이나 액셀러레이터다. 스타트업들은 제도권 금융회사가 다루는 주식이나 금융상품과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참고할 만한 과거 실적이 거의 없다. 매출도 많지 않고 영업이익은 십중팔구 적자다. 스타트업 창업자의 담보라고는 ‘아이디어’와 ‘열정’뿐이다.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벤처투자회사들의 행태는 제도권 금융회사와 비슷하다. 사업 모델의 독창성, 글로벌 시장 확장성 등의 자의적인 기준을 만들고 수치화된 점수를 매기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디어에 등급을 매기는 곳도 상당하다. 이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의미가 있는 작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골목식당 속 식당 생태계는 스타트업 생태계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손님들에게 외면받는 식당을 위기에 내몰린 스타트업으로 치환할 수 있다. 다른 것은 해법이다. 백종원은 식당의 단점을 들추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장점을 찾아 이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점수화할 수 있는 지표보다 식당 주인들의 열정을 더 높게 평가한다.
스타트업의 잠재적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려면 ‘의심’을 근간으로 한 기존의 방법만으로는 곤란하다. 백종원처럼 ‘믿음’을 밑바탕에 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감내할 수 있는 실수와 실패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정한 다음 실무자에게 재량권을 주는 게 대안일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스타트업의 메카가 된 것은 시장이 넓어서만은 아니다.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하고, 때로는 덮어놓고 믿어주는 ‘신뢰 자본’이 넉넉한 게 더 큰 배경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신뢰 자본을 기반으로 글로벌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키워낸 금융회사들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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