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창립(1938년) 이후 80년 넘게 유지해온 ‘무노조 경영’ 원칙을 최근 포기했다. 삼성은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 “노조에 대한 시각과 인식이 국민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한국노총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을 지탱해온 ‘성과주의’가 노조 때문에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석 달 새 세 곳에 노조 들어서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디스플레이 노동조합조직위원회는 최근 상급단체로 한국노총을 지정했다. 노조 이름은 ‘한국노총 금속노련 삼성디스플레이 노동조합’으로 정했다. 이날부터 11일까지 직원 대상 찬반 투표를 한다. 직원들은 ‘한국노총 찬성’ 또는 ‘한국노총 반대(민주노총 찬성)’를 선택할 수 있다.
삼성디스플레이에 노조가 설립되면 노조 있는 삼성 계열사는 전체 계열사(61곳) 중 19.8%인 12곳이 된다. 최근 석 달 새 삼성전자, 삼성화재 등 세 곳에 상급단체 소속 노조가 들어설 정도로 노조 조직 속도가 빠르다. 12곳 중엔 민주노총 소속 단독 노조가 5곳(삼성생명 삼성전자서비스 삼성SDI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에스원)이고, 한국노총 단독은 3곳(삼성화재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삼성디스플레이)이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증권, 삼성웰스토리엔 2개 이상 노조가 설립돼 있다. 삼성증권엔 민주노총 소속 노조가 2개다.
아직은 소수인 노조원
삼성은 1938년 창립 이후 ‘무노조 경영’ 원칙을 지켜왔다. “경쟁사에 비해 우수한 근로 환경을 조성해 전 임직원이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고(故) 이병철 회장의 유지를 후대 경영진이 이어왔기 때문이다. 업계 최고 수준의 성과 보상과 복지, 인재 중시 문화는 ‘무노조 경영’의 산물이란 평가가 나온다.
직원들이 ‘노조 조직’ 필요성을 못 느끼면서 삼성 계열사에 들어선 노조들은 가입자 확보에 애를 먹었다. 2011년 출범한 민주노총 소속 삼성물산(옛 에버랜드) 노조 조합원은 한 자릿수이고, 한국노총 소속은 20명을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전체 직원(1326명)의 2%도 안 된다. 삼성 계열사에 있는 12개 노조 중 전 직원의 10% 이상을 노조원으로 확보한 곳은 비정규직 서비스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 전 설립된 삼성전자서비스밖에 없다.
최근 노조가 잇따라 생기고 있는 것은 국내 최대 기업 삼성에 ‘깃발’을 꽂으려는 노동계의 조직 확대 전략 때문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삼성디스플레이에 노조 설립 움직임이 감지되자 양대 노총은 법률지원단 등을 꾸려 경쟁적으로 접촉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투쟁 지양해야” 목소리 커
삼성과 노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삼성이 고백했던 것처럼 ‘노조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걷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사실상 포기한 만큼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직원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 노조에 대해선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상생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반면 노조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장기적인 발전보다 단기적인 이익을 최우선 순위에 뒀던 양대 노총의 행태 탓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낮은 생산성과 높은 임금은 한국의 강성 노조가 만들어낸 고비용, 저효율 문화”라며 “노조가 없는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경쟁 업체들과 달리 삼성이 노조 리스크에 휩싸이면 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양보한 만큼 상급단체를 둔 노조도 정치투쟁보단 삼성의 장기적 발전과 상생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직원 사이에서도 “투쟁만 하는 정치노조는 거부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정수/정인설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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