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연이 세계은행 통계를 기초로 분석한 데 따르면 우리나라의 통화유통속도 하락률은 2018년 한 해 동안에만 3.5%에 달했다. 비교가능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16개국 가운데 하락률이 가장 컸다. 화폐 1단위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한 해 동안 몇 번 회전하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유통속도는 경제현장의 활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간주된다. 속도 하락은 시중 자금이 생산·투자·소비로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의 금고나 주머니 속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018년 한국 통화유통속도는 0.72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0.80)보다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전고점인 2004년의 0.98과 비교하면 27%나 낮아진 것이다. 둔화추세가 최근 더욱 더 빨라지고 있는 점이 걱정을 더한다. 작년 3분기(9월 말) 통화유통속도는 0.68로 추락하며 통계 작성 이래 최초로 0.6대로 진입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0.7~0.8 구간을 일시에 하향돌파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규모가 커지고 선진사회로 갈수록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하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만큼 한국 경제 전반의 활력이 빠르게 취약해지고 있다는 강력한 경고음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통화유통속도 급락은 경기조절의 핵심 수단인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크게 감소시키게 된다. 통화공급 증가를 통해 명목소득을 끌어올리는 전통적인 경제정책은 유통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될 때라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화유통속도가 재정정책의 효과를 나타내는 통화승수의 최근 급락현상과 맞물리면서 통화정책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수출 반등 등 몇 가지 유리한 지표만 끄집어내 낙관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릴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금리인하를 압박하고, 국회를 향해서는 더 많은 재정을 요구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로 흐르지 않고 신용 창출이 극도로 제한되는 상황에서 금리인하와 재정퍼붓기에 매달려서는 경제 호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규제완화를 통한 투자 촉진 등 근본적인 처방이 뒤따르지 않는 돈 살포는 우리 경제의 주름을 키우고 회복불능 사태로 몰고갈 뿐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법인세 인하와 기업 기살리기로 2017년부터 3년 넘게 통화유통속도가 상승하고 있는 미국의 사례를 꼼꼼히 살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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