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더리스 웨어, 정통적 가치관을 허물다

입력 2020-02-28 11:13  


[박찬 기자] 영국 런던교통공사에서는 2017년부터 지하철 안내방송에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 말을 대체해서 ‘여러분 안녕하세요(Hello everyone)’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 두 개의 성별을 칭하는 신사, 숙녀라는 말 대신 ‘여러분’ 같은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성별과 관계없이 함께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Gender)’이라는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런웨이 위의 모습은 어떨까. 2020년, 패션계에서는 성의 구분을 없애는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이 핫한 트렌드로 꼽혔다.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철폐하고 오직 개성과 콘셉트로 판단하는 시대. 젠더 뉴트럴 트렌드는 극적인 색채로 영감을 표현한다. 최근 컬렉션에서 남성 모델들에 핑크 컬러의 재킷을 입히기도 하며 중년 여성이 입을 법한 그래니 원피스를 레이어드하기도 한다. 이제는 여성 모델이 남성용 슈트나 볼드한 워크 웨어를 입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이엔드 브랜드뿐만 아니라 SPA 브랜드의 리테일러들도 젠더리스 웨어에 눈을 뜨고 있다. ‘자라(ZARA)’의 ‘언젠더드 라인(Ungendered Line)’은 셔츠와 점퍼를 중심으로 남녀 공용으로 입을 수 있는 컬렉션.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H&M’은 ‘데님 유나이티드 라인(Denim United)’이라는 유니섹슈얼 콘텐츠를 출시해 다양한 형태의 데님 웨어를 판매하고 있다. 젠더리스 웨어가 이미 기성복의 미래로 자리 잡은 셈.

젠더리스 웨어의 철학은 ‘모두의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시작된다. 아름다움을 누구에게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하고 성별과 관계없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꿈꾸는 것. 그뿐만 아니라 패션쇼를 통해 의류를 선보이는 것 외에도 사회적 이슈를 상기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된다. 다시 말해서 젠더리스 웨어는 패션을 뛰어넘어 대중에게 사회, 문화적으로 고착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패션계에서 ‘젠더리스 신드롬’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New Casual]


2020 봄, 여름 컬렉션을 통해 파리 패션위크를 데뷔한 ‘이티스(eytys)’는 스톡홀름 캐주얼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았다. 배기팬츠와 여유로운 핏의 스포티한 무드가 특징인만큼 활동성에 가장 많은 모습을 그렸다. 콘셉트마다 독특한 결합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그들은 젠더리스 룩 위에 사이보그, 카우보이, 피셔맨 콘셉트 등을 섞어내었고 뭉툭하고 두터운 스니커즈가 그 안을 장식했다.

이티스의 미학은 매우 단순하다. 얼핏 보면 단순한 캔버스 슈즈, 레트로한 느낌의 코튼 티셔츠와 스트레이트 핏의 데님이지만 직접 마주하게 될 때 브랜드 특유의 디테일을 느낄 수 있다. 남자 여자의 관계를 벗어나 활동하기 편하고 데일리 웨어에 적합하다는 것이 특징이며 어느 옷에도 세련된 캐주얼 무드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이번 2020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는 브랜드 특유의 높은 아웃솔과 스포츠 슈즈의 조화, 긴 티셔츠 헴라인과 로고 규격 등으로 특별한 디테일을 선보였다. 이티스 특유의 유머 감각을 남긴 티셔츠 그래픽과 새틴, 벨벳 등 다양한 소재로 제작한 팬츠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의 2020년은 곧고 확실하다. 물결처럼 빛나는 런웨이 바닥 위에는 직선적인 실루엣이 엿보였다. 그의 영감 속에 젠더리스 웨어는 세련된 감정으로 남고 있는 듯했다. 큼지막한 레더 자켓, 볼드한 스퀘어 토트백, 프린지 팬츠 등 이색적 아이템을 미래적으로 풀이하며 알렉산더 왕 특유의 믹스 매치를 통해 그 실험을 이어나갔다.

동시에 연출된 그의 미국적인 이미지와 콘셉트는 모델을 더욱 빛나게 했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랄프 로렌(Ralph Lauren)’,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 등 20세기 후반의 미국 대표 브랜드를 재해석한 그의 컬렉션은 획기적인 발견의 연속이었다. 대담한 어깨 핏과 솔직한 스트레치 저지 바디 수트는 젠더리스의 강렬함을 표현한 듯했다.

빅 심볼 티셔츠, 90년대 향이 물씬 풍기는 초경량의 워싱 데님 진, 겉옷 위의 언더 웨어는 캘빈 클라인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감각적인 질감의 성조기 롱슬리브는 타미힐피거의 영광을 다시 걸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 패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컬렉션에 담아냈던 것. 그의 젠더리스 웨어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 듯했다.


언제나 획기적이고 신선한 캠페인을 함께 몰고 온 ‘MSGM’도 이러한 물결에 합류했다. 뛰어난 패턴과 그래픽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던 만큼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특유의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는 데일리 캐주얼 웨어에 적합했다. 특히 다채로운 컬러의 고급 패브릭 소재를 통해 여성 탑 아이템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는 그들이다.

이번 컬렉션의 MSGM은 팝 컬처 스타일의 도전적인 프린트와 참신한 디테일이 돋보이며 화려한 색감으로 그 모습을 정의하고 있다. 이미 독보적인 컬러 무드를 걷고 있는 그들이지만 인물 프린트, 핑크 도트 스카프 등 유니크한 아이템을 통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젠더리스 웨어를 이룩하고 있는 것. 그들이 출시한 핸드백은 작고 귀엽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가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화이트 체인 디테일을 통해 스트리트 무드에도 적합하며 퓨처리즘에도 연결 지을 수 있기 때문.

그들 특유의 예리한 감성은 이번에도 통했다.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네온 컬러는 가지각색의 반짝임으로 표현되었고 올드하다고만 생각되었던 트위드 재킷은 현대적인 방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펑키한 무드가 번뜩이는 MSGM답게 가볍고 실용적인 아이템이 주를 이뤘던 것. 평범하다고만 생각됐던 캐주얼 룩이 젠더리스 웨어와 만나면서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사진출처: 나파 바이 마틴 로즈, 이티스, 알렉산더 왕, MSGM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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