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변방국가서 승자 된 신라…비결은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

입력 2020-02-28 17:47   수정 2020-02-29 02:36


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와 사회, 문명을 건설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산업력’ ‘기술력’ ‘무장력’ 등이 떠오르지만 근본은 ‘사람의 힘(人力)’이고, ‘사람산업(정신사업 인재양성사업)’이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문화국가’ ‘경제국가’라고 자만한 아테네에 승리한 근본적 이유는 단결심, 애국심, 책임감을 지닌 시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4세기 말까지도 세계 질서에 어두웠고, 자체의 통일조차 완수하지 못한 변방의 ‘소국연맹국가’였다(이종욱 교수). 그런데 5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그 증거가 경주 대릉원에 남은 큰 규모의 고분들과 그 안에서 발견된 황금유물들이다. 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높이가 25m나 되는 황남대총(98호 고분)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은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의미한다. 기술력과 경제력도 급신장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에서만 6개 발견된 금관·허리띠, 금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황금유물과 구슬·유리제품들은 부가가치가 절대적인 금광산업과 화공기술이 발달했고, 상상을 뛰어넘는 공예 기술력 또한 갖췄음을 증명한다. 알타이 산록의 이식고분군에서 발굴된 황금인간, 사르마트 금관, 틸리아테페 금관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기술과 미(美)의식은 신라가 매우 수준 높은 문화사회로 진입했으며, 국제사회에 적극적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5세기의 전면적 국가 변혁

알타이 유목민 문화와 비슷한 적석목곽 고분과 금관 등 부장품들, 유리제품 등 수입품을 근거로 신라가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왕실이 흉노계라는 주장도 있다(김병모 교수). 자생설(박선희 교수)도 있지만, 그 연관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건국의 주체인 원조선의 유민을 통해 만주 및 알타이 유목문화와 연관이 있었다. 그런데 왜 수백 년이나 흐른 5세기에 다시 비슷한 문화가 등장했을까?

그 시대에 등장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을까? 서기 400년에는 광개토태왕의 5만 군대가 신라의 파병 요청을 명분으로 신라 영토에 진입했다. 신라는 계속해서 영토를 빼앗겼고, 자주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라인은 이 같은 현실을 역이용했다. 고구려인이 가져온 선진 문물과 기술력, 군수품과 군대의 조직력 등을 수용했다. 실성왕처럼 인질로 파견된 왕족과 귀족은 국가 조직의 실태와 운영 능력을 습득했고,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세계의 문화 등을 배우면서 국제질서를 파악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게 됐다. 408년에는 고구려 주도이긴 했지만 대마도(쓰시마섬)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였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이어 5세기 후반부터 국가의 전면적인 변혁이 추진됐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신궁을 설치(487년)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도로를 정비하고 시장을 활성화시켰다(490년).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서해를 건너 중국 지역과 교류를 시작했다. 또 김이사부의 주도로 반세기 동안 정치적인 야망, 토지나 인민의 증가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략적인 거점들을 단계적으로 확보하는 전쟁을 추진했다. 그리고 ‘마립간(칸)’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법흥왕 때부터는 ‘대왕(태왕)’으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 이어 골품제를 실시하고, 관부를 설치하며, 군사조직을 개편했다.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연대성이 강한 불교를 공인했다.

선덕여왕 땐 황룡사에 약 80m에 달하는 9층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적, 9층은 예맥을 억누른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약소국인 신라 지도층이 자신과 백성들에게는 물론이고 주변국들에 강국의 건설과 통일의 실현이라는 일종의 국시를 자신감 있게 선언한 징표는 아닐까? 이렇게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신사회를 꿈꾼 신라는 ‘화랑’이라는 특별하고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강국의 기초 ‘화랑’

화랑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화랑은 ‘풍월도’를 수행하는 젊은이 집단이다. ‘화랑도’는 일본 학자 미지나 아키히데가 만든 조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미 풍월주가 있었다.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견해를 고려하면 원조선을 계승하면서 건국 초부터 비슷한 조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5세기부터 고구려 문화와 ‘조의선인(고구려의 수행자 군사집단)’ 등의 영향을 받으며 구체화되고, 질적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많은 생명과 만나 변화를 이룬다.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 그들은 ‘하늘(天)에 대한 맹세’를 하고,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혼란하면 가히 맹세를 행한다’는 내용을 돌에 새겼다(임신서기석). 또 승려인 원광은 7세기 초, 위기 상황에서 화랑의 역할을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정의했다. ‘충과 효’라는 국가의 가치관과 ‘우애와 용기’라는 사회적 가치관,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상을 구현하는 ‘청년결사체’를 지향한 것이다.

차세대 리더들인 화랑은 왕 또는 고승이 추천한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었다. 각각 수백 명에서 1000명 정도의 낭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독특한 수행 방법을 지녔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화랑 무리가 도의를 함께 닦고, 노래와 춤을 더불어 즐기며, 명산과 큰 강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으며…’라고 나와 있다. 신라의 청소년들은 고구려 쌍영총·무용총 벽화나 온달이 참여한 낙랑언덕의 행사처럼 거친 자연을 찾았다. 육체적인 훈련과 명상, 춤 등의 수행을 하면서 외경심과 실존을 체험했다. 또 지리와 전술을 익히고 전투훈련을 하며 기상과 용기, 동료애를 다졌다. 그리고 백성들과 접촉하고 만나면서 이상정치를 위한 마음과 지혜를 찾았다.

왕손이자 화랑인 김사다함은 1000여 낭도를 거느렸다. 562년에 김이사부가 가야국을 공격할 때 15세의 나이로 출정해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생사고락을 맹세한 동료가 병으로 사망하자, 7일 동안 비통해 하다 결국 죽고 말았다. 김관창은 어려서 화랑이 됐고, 15세 때 무열왕 김춘추에게 천거됐다. 660년, 관창은 백제군과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일 때 홀로 돌진해 싸우다 포로가 됐다. 계백장군은 어린 관창을 풀어 줬지만, 수치심을 못 이긴 그는 또다시 돌격해 포로가 됐다. 계백은 결국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신라군은 피 흘리는 관창의 목을 보고는 진격했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원효도 어린 시절에는 낭도였다가 승려가 됐으니, 국가에 충성하는 화랑 출신 승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新)화랑’ 출현을 고대하며

약소국인 신라는 5세기부터 고구려 영향과 초원 유목문화를 수용해 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어 가야와 백제를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삼국통일을 실현했다. 그 위업에는 산업 발전과 기술력, 군사력과 경제력도 작용했지만 용기와 자유의지, 사명감으로 가득한 ‘화랑’이라는 인재와 ‘풍월도’라는 고유 사상의 역할이 컸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풍류를 ‘멋스럽게 노는 일’로,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들은 ‘바람기 있고 멋 부리는 행위’로 변질시켰다.

지금 한국은 국가와 사회의 지표가 분명치 않다. 경제는 나빠지고, 사회 갈등은 더욱 심각해지고,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청년들은 창의력과 용기를 잃고, 단기적인 삶에 몰두하고, 아이들은 가치와 사유를 교육받을 기회조차 빼앗긴 채 정치 권력, 금력과 결탁한 대중연예문화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풍류를 ‘멋스럽게 노는 일’ ‘바람기 있고 멋 부리는 행위’로 변질시킨 성리학자들과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들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이 시대에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같은 ‘신(新)화랑’의 출현을 고대한다. 광야에서 초인을 외쳐 부른 이육사의 심정으로.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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