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24번째 장편 ‘도망친 여자’로 지난달 29일 폐막한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받았다. 세계적 권위의 국제영화제인 이 영화제에서 한국인이 감독상을 받은 것은 2004년 ‘사마리아’의 김기덕 감독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차지한 데 이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인 또 하나의 쾌거라는 평가다.
홍 감독은 이날 시상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동석한 연인 김민희와 포옹을 나눈 뒤 무대에 올라 “모든 사람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나를 위해 일해준 사람들,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심사위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어 “허락한다면, 여배우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도망친 여자’에 출연한 김민희와 서영화가 일어나 함께 박수를 받았다.홍 감독은 ‘밤과 낮’(2008),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 이어 올해 네 번째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주연 배우 김민희는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홍 감독의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과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1998년 ‘강원도의 힘’이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특별언급상’, 2010년 ‘하하하’가 같은 부문 대상을 탔다.
홍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도망친 여자’는 결혼 후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던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두 번의 약속된 만남과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과거 세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는 감희(김민희 분)를 따라가는 영화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일곱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권해효 등이 출연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회는 이 영화에 대해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여주인공 감희가 친구 셋을 만나는 상황을 미니멀리즘적으로 묘사한다”며 “영화는 많은 부분을 드러내지 않지만, 무한한 수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평했다.
수상 후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홍 감독은 이 영화가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해 현대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는 평가에 대해 “나는 큰 그림을 그리거나 큰 의도를 갖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며 “작은 세계에서 조그맣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되도록 큰 의도를 갖고 만드는 유혹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한다”며 “강한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세부적인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도망친 여자’는 올봄 국내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올해 최고상인 황금곰상은 이란 감독 모하메드 라술로프의 ‘데어 이즈 노 이블’이 차지했다. 도덕의 힘과 사형이란 주제를 네 가지 이야기로 변주해 개인의 자유가 독재정권과 위협 아래서 어느 정도까지 표현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은 미국 출신인 엘리자 히트먼 감독의 ‘네버 레얼리 섬타임스 올웨이스’, 남우주연상은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리가부에의 전기 영화 ‘히든 어웨이’의 엘리오 게르마노, 여우주연상은 독일 영화 ‘운디네’에서 고대 신화에 사로잡힌 역사가 역을 맡은 폴라 비어에게 돌아갔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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