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의 담화는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이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송 선생(당시 송영대 남측 대표)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 것을 연상케 한다. 북한의 고위 당국자가 공개회담에서 원색적으로 우리를 협박한 이 발언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북분단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았다. 이후 핵을 손에 쥔 북한의 고위 인사들이 남한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등의 협박을 끊임없이 해왔다. 하지만 백두혈통이자 김정은의 정치적 동지이며 가장 믿는 후원자인 김여정의 독설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김정은이 친서를 보낸 이유는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남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월 1일자 노동신문에서 7000명 정도의 ‘의학적 감시대상자’가 있다고 공개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다급해진 김정은이 불쑥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왜 그의 여동생이 한국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담화를 발표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독설을 내뱉은 바로 다음날 우리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는 온정 가득한 친서를 보낸 것은 더 큰 의문이다. 해답은 두 가지다.
첫째, 북한이 대남정책을 집행하는 데 남한당국의 반응은 주된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정은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도 남한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핵무기를 포함해서 그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김여정이 독설을 퍼부은 바로 다음날 정반대되는 내용의 친서를 보낼 수가 없다. 대한민국을 ‘졸(卒)’로 여기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선과 악의 상반된 두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정권의 속성이다. 정상적인 지도자라면 친서를 보낼 때, 김여정의 잘못에 대한 유감표명 정도는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김정은이 깊이 신뢰하는 문 정부에 대한 친동생의 잘못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맞다. 그러나 김정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제의 독설을 오늘의 감언이설로 덮음으로써 독재정권의 뻔뻔스러운 진면목을 보여줬다.
우리 국민의 건강을 걱정한 김정은의 친서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감명과 위로를 받았을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아쉬우니까 손 내미는 거라고 여기는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고통받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국민의 안위가 먼저여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마다 경험하는 비상시 대피훈련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 기내 기압이 떨어져서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때, 승객들에게 자신이 먼저 착용한 다음 주변의 노약자를 돕도록 한다. 내가 살아야 어려운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뜻인데, 남북관계에서도 우리 국민이 부강해야 북한동포를 지원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행복을 보장하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다. 국민보호와 국민행복은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남북관계는 물론 대외관계에서 정부가 견지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그런 정책이어야만 국제사회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준 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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