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현대 경제성장이론이 제시하는 원리 중 하나는 (기계)투자에만 의존해서는 장기성장률을 높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경우 물적자본 투자도 빨리 일어나지만, 이 경우 기계 축적은 성장의 주엔진인 인적자본이 많아질 때 자본수익률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수동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중앙은행이 물적자본 투자를 성장의 주엔진으로 착각해 과도한 투자촉진 정책을 추진한다면 마치 말 앞에 마차를 놓고 달리게 하는 것 같은 위험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인적자본과 물적자본의 역할은 말과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인적자본 성장이 말처럼 앞에서 이끌고 물적자본 성장이 마차처럼 뒤따라 줘야 효율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진다. 물적자본 투자를 말로 착각해 경기변동 대응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투자촉진 정책을 펴면 추후에 실물경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과잉 투자촉진 정책에 따른 경제위기의 대표적인 예가 1990년대 초의 일본이다. 장기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1980년대 중·후반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포함한 강력한 투자촉진 경기부양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30%를 웃도는 높은 투자율과 5%대 이상의 높은 연간성장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인위적 경기부양의 결과였기에 이때 형성된 과잉투자 및 부동산 거품이 결국 1990년대 초 문제가 돼 터지면서 일본은 연간성장률이 1980년대 말 5%에서 순식간에 0%대로 급전직하하는 경제위기를 맞았다.
더 비근한 예는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다. 위기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 장기성장률이 하락한 결과 1992년 한국의 연간성장률은 6%대로 하락했는데, 당시 정부는 경기부양책으로 대응했다. 장기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면 이는 투자수익률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투자율이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경기부양책으로 대기업과 재벌의 설비 투자와 건설 투자를 엄청난 규모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투자율이 36~37%대의 높은 수준에서 하락 없이 유지되는 ‘장기성장률 하락 속의 투자율 횡보’ 현상을 나타냈다. 이는 인위적 경기부양 때문에 적정 수준 이상의 투자, 즉 과잉 투자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높은 투자율을 뒷받침하기 위해 은행 대출은 1992년 이후 5년 동안 두 배나 증가하고, 기업과 가계부채도 그만큼 늘어났다.
과잉투자가 이뤄지면 상당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패투자, 부실투자로 판명이 난다. 대표적인 예가 한보철강이다. 1997년 위기는 그해 1월의 한보사태에서 시작된다. 한보철강은 은행에서 5조원 넘는 돈을 빌려 제철소를 건설했는데,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되지 않아 결국 실패투자로 판명 나게 됐다.
1997년 위기는 한보를 포함해 당시 재벌들의 투자 중 상당 부분이 부실투자로 판명이 나며 발생한 실물위기가 그 본질이다. 실물 부문의 과잉투자가 부실투자로 드러나면서, 이들에 대한 은행들의 대출도 부실화돼 1997년 중반에는 금융부문의 위기도 수반하게 된다. 실물위기가 금융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실물부문은 튼튼한데 금융부문 유동성 위기가 실물위기까지 촉발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1997년 말에 가면 은행들의 부실화로 인해 외국 자금이 이탈해 한국은행까지 달러가 바닥이 나면서 외환위기로 발전했다. 실물위기가 금융위기, 외환위기로 연결되는 복합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울삼아야 한다. 그간의 성장추락기에 과잉 투자촉진 정책으로 잘못 대응해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배태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시점이다. 과도한 투자지상주의는 장기성장추세를 반전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위기까지 불러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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