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돈줄이 마르고 있다. 지난해 국내 간판 기업들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이 2018년보다 30%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임에도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업황 악화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기업이 갚아야 할 돈인 순차입금(총차입금-현금성자산)은 작년 40조원 넘게 불어났다.
코로나19로 올해 기업들의 현금 동원 능력이 더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에 ‘빨간불’이 켜졌다면 그 밑에 있는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더 클 것”이라며 “현금흐름 악화가 산업 전반의 위기로 확대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4년 이후 현금 창출 능력 최악
한국경제신문이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매출 기준 상위 30개 상장사(지주·금융·공기업 제외)의 2019년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00조2988억원에 그쳤다. 전년(140조5606억원)보다 28.6%(40조2618억원) 줄었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줄어든 것은 2014년 후 처음이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직원을 고용하고 물건을 제작해 파는 기업활동 과정 끝에 기업이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을 말한다. 오현석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해 무역분쟁과 반도체 경기 둔화로 순이익이 급감한 것이 영업활동 현금흐름 감소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30개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1040조4984억원으로 전년보다 0.7% 줄었다. 영업이익은 58조6822억원, 순이익은 36조688억원으로 각각 48.2%와 55.8% 급감했다. 여기에 재고자산이 114조1636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도 현금흐름엔 ‘독’이 됐다. 재고자산이 늘어났다는 것은 제품이 팔리지 않아 그만큼 기업이 현금을 챙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2018년 67조원에 달했던 삼성전자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지난해 45조3829억원으로 32.3% 줄었다. 현대차(-88.8%), 삼성물산(-54.1%), SK하이닉스(-70.8%), 현대제철(-60.2%), 두산중공업(-56.2%) 등은 더 큰 폭으로 줄었다.
삼성전자 빼면 순차입금 128조원에 달해
갚아야 할 돈은 크게 늘었다. 30대 기업의 순차입금은 지난해 37조5779억원으로 보유 현금이 더 많았던 전년(-6조4435억원)보다 44조214억원 증가했다. 설비투자와 인수합병(M&A)을 위해 기업들이 대출과 채권 발행을 통해 빌린 총차입금이 248조7136억원으로 50조원 넘게 불어난 영향이다.
하지만 이렇게 늘어난 차입금마저도 순현금을 90조원 보유한 삼성전자 때문에 빚어진 착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삼성전자를 빼면 29개 기업의 순차입금은 지난해 127조9456억원에 달한다. 마찬가지로 삼성전자를 뺀 영업활동 현금흐름(54조9159억원)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급성장하는 2차전지 시장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설비투자를 대폭 늘린 SK이노베이션(지난해 순차입금 7조7093억원)과 LG화학(6조4931억원), LG헬로비전(옛 CJ헬로)을 인수한 LG유플러스(5조2755억원) 등이 작년보다 순차입금이 두 배 넘게 증가했다.
현금흐름이 악화된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국내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이 더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잇달아 경고를 보내고 있다. 순차입금이 2016년 5083억원에서 작년 6조1374억원으로 급증한 에쓰오일에 대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30일 현재 ‘BBB’인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