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광주형 일자리, 이럴 거면 왜 하나

입력 2020-03-31 18:03   수정 2020-04-01 00:14

노사 상생과 사회 대타협을 기치로 내걸고 추진된 광주형 일자리가 좌초 위기에 처했다. 노·사·민·정 협의에 노동자 대표로 참여했던 한국노총이 등을 돌린 것이다. 한국노총 광주본부는 최근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며 협약 파기를 선언했다. 노동계가 이 사업에서 빠지면 사회적 대타협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광주형 일자리는 명분을 잃게 된다.

지난해 1월 말 어렵게 사회적 대타협을 체결한 광주형 일자리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해 성대한 협약 조인식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노동계 대표는 “결코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노·사·민·정은 △주 44시간 노동, 평균 초임 3500만원 △35만 대 생산 시까지 임·단협 유예(5년 예상) △동반성장과 상생협력 등을 조건으로 하는 투자유치 협약서를 체결했다. 이 협약서를 바탕으로 광주시는 현대자동차와 투자협약을 맺고 자동차 공장인 광주글로벌모터스(GGM) 설립에 나섰다.

하지만 그후 노동계 대표로 참여한 한국노총이 협약서에 없는 내용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문제가 꼬였다. 노동계는 △현대차 추천 이사 경질 △노동이사제 도입과 원·하청 관계 개선 시스템 구축 △임원급 임금을 노동자의 2배 이내에서 책정 △시민자문위원회 설치 등을 요구했다. 대부분 요구가 경영권에 관한 것으로, 광주시와 현대차 간에 맺은 투자협약서에도 들어있지 않은 사항이다. 한국노총은 이런 조건들을 광주시가 수용하지 않는다며 지난해 말 자동차 생산공장 착공식에 불참한 데 이어 이번엔 협약파기까지 결정했다. 책임 있는 경제주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핵심은 적정임금이다. 임금을 기존 업계가 아닌, 지역 제조업 평균 수준으로 낮춰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괜찮은 일자리를 늘려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에서 시도됐다. 노동계로부터 임금 수준을 양보받는 대신 현대차 등으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겠다는 의도였다. 광주형 일자리에 관심이 없던 현대차는 이 사업이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데다 적정임금이라는 ‘당근’까지 제시하며 팔을 비트는 바람에 정부와 광주시의 투자 압박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광주시는 협상 초기 투자자들에게 “광주지역 노·사·민·정 협의회는 다른 지역과 차원이 다르고, 신설법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하다”고 설명하며 투자를 유인했다. 현대차가 사업성도 별로 없는 배기량 1000cc 미만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생산공장에 투자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유인책에 끌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국노총은 노·사·민·정 간 협의 내용에도 없는 경영에 관한 사항들을 요구하고 있고, 광주시는 이런 요구 중 일부를 수용할 태세다.

일부에서는 광주시와 노동계가 이면 약속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겉으로는 광주시가 투자자 유인을 위해 적정임금과 5년 임단협 유예 등을 내세웠지만 뒤로는 노동계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이 ‘합의파기 결정’이란 압박카드를 꺼낸 것도 이런 이면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과정이란 해석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사·민·정 협약에 도장을 찍은 노동계가 과도한 요구들을 추가로 제시하며 합의 파기를 선언한다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사회적 대타협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광주형 일자리사업 참여를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맞다. 광주시 역시 노동계가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도록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광주형 일자리를 더 이상 추진할 명분이 없다. 광주형 일자리는 일자리를 늘리고 기업의 경쟁력도 높이자는 취지에서 추진해온 사업이다. 그런데 노·사·민·정 협정에도 없는 경영권 개입 조항들을 노동계가 추가로 요구하고 광주시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그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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